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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알파걸의 나라에 성범죄가 판치는 이유

중앙일보 2017.08.01 01:18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너무 무서우면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친구와 놀다 오던 길, 누군가 자신을 낚아채 후미진 골목으로 끌고 갔단다. 거친 손길로 옷을 찢는 남자의 형체가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났는데 분명 동네에서 한두 번쯤 마주친 얼굴이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행인의 발걸음 소리에 남자가 황급히 달아나면서 더 이상의 몹쓸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기다시피 집에 가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엄마는 그 길로 범인을 찾아 나서지도 경찰서로 달려가지도 않았다. 그저 씻겨주며 어서 자라는 말뿐이었다. 이후로도 집안 식구 아무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언제 또다시 그 남자와 마주칠지 모른다는 공포감, 자기 자신이 더럽혀진 듯한 수치심을 이겨내는 건 오롯이 혼자의 몫으로 남았다.
 

왜곡된 성 의식 여전 … 처벌 강화만으론 뿌리 못 뽑아
‘성 평등 정부’가 여성 비하 인사 중용한 오류 고쳐야

얼마 전 내게 초등학생 시절의 끔찍한 경험을 들려준 지인은 “혹시 소문 나면 더 큰 해를 입게 될까 봐 다들 쉬쉬했을 것”이라며 “이젠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누구든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줬다면, 그리고 범인을 찾아내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했더라면 긴긴 시간을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그 얘길 들으며 내 가슴도 한없이 답답해졌다. 그때나 20여 년이 흐른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아서다. 경기도 여주시의 모 고교에서 터진 여학생 집단 성추행 사건에서 보듯 2차·3차 피해를 우려한 피해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해자들은 정당한 처벌을 피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뉴스가 되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 얼마나 많은 성범죄가 수면 아래 감춰져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몇 주 전 한 교수님께 전해 들은 대학 내 상황만 해도 그렇다. 같은 대학교수에게 오랜 기간 성폭행을 당해 온 대학원생 제자가 참다 못해 고소를 했는데 그 교수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며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는 거다. 평소 교수 사회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터라 추가 피해자가 있을 공산이 크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 입장에선 신분이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걸 꺼릴 수밖에 없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악용해 ‘성 갑질’을 한 것도 모자라 피해자들 입까지 틀어막은 형국이다. 이 얘길 전한 교수님은 “대학마다 숨기기 급급해서 그렇지 비슷한 일이 다반사”라며 혀를 찼다.
 
2년 전쯤 이 자리에 실린 칼럼에서 ‘성희롱 문제의 해법은 도덕심이 아니라 관계의 평등함’이라고 쓴 적이 있다. 성추행·성폭행도 매한가지다. 법과 제도가 개선됐다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성범죄로 악명 높은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가 턱없이 낮다는 걸 떠올려 보시라. 알파걸들이 판치는 우리나라는 경우가 다르지 않냐고? 그리 다를 것도 없다. 집집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잘난 딸들이 집 밖으로 나서기 무섭게 을 중의 을로 전락하는 게 현실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저출산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성 평등 의식의 부족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뿌리 깊은 성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출산은 물론 성범죄 해결도 요원하단 얘기다.
 
예전에 성폭행 처벌 강화 소식을 접한 주변 남자들이 “한강에 배 한 척 더 지나간 셈인데 뭐 그리 난리냐”고 구시렁대는 걸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요즘은 그보단 좀 나아진 걸까. 아직 갈 길이 멀지 싶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과거 소행을 떠벌리며 여성을 성적 도구로 대놓고 비하한 인사가 주요 국가 행사를 챙기는 게 우리 현주소다. 그것도 “젠더 폭력에 눈감지 않겠다” “성 인지적 인권 감수성을 높이겠다”며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대통령의 측근에서 말이다. 여론의 숱한 질타에도 “일을 너무 잘해서 못 자른다”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던데 과연 그게 ‘여성 장관 30%’를 실현한 ‘성 평등 정부’에서 나올 소리인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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