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핑크스 문 들어서니, 3500년 전 철의 제국 위용이 …

중앙일보 2017.08.01 01:00 종합 21면 지면보기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하>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는 1만여 명이 거주했다. 하투샤 출입문 중 하나인 ‘사자의 문’. 왼쪽 사자상은 원형이 손상돼 새로 복원한 것이다. 사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는 1만여 명이 거주했다. 하투샤 출입문 중 하나인 ‘사자의 문’. 왼쪽 사자상은 원형이 손상돼 새로 복원한 것이다. 사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먼 옛날, 고대인도 미래를 준비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재해를 우려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식량. ‘철의 나라’로 유명한 히타이트 제국(기원전 18세기경~기원전 1180년)은 10~12년 단위로 가뭄·지진 등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곡물창고를 지었다. 망가진 경작지를 되살릴 종자를 따로 보관했다. 많게는 수백 t에 이르렀다. 32년째 해당 유적을 지켜온 안드레아스 샤흐너(독일) 발굴단장은 “자연재난에 대비한 시스템 덕분에 히타이트가 거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대 히타이트 수도 하투샤
6㎞ 성벽에 싸인 고도 1000m 도시
종자 수백 t 쌓아두던 곳간의 흔적
인류문명 뒤흔든 제철기술도 발명

지난달 23일 찾아간 고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현 보아즈칼레).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150㎞ 정도 떨어진 이곳에는 날씨의 신, 태양의 신에게 바친 대규모 사원 터가 남아 있다. 가로·세로 반듯하게 구획된 사원에서 눈에 띈 것은 배수시설. 중앙보다 바깥 부분을 3도 정도 낮게 만들었다. 비가 오더라도 물만 빠지고 빗속의 흙은 사원 바닥에 남도록 설계했다. 한광야 동국대(도시계획) 교수는 “배수의 기울기를 계산하고, 신전·거주지·시장 등을 격자형으로 구획한 고대 도시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신들의 계곡’으로 불리는 야즐르카야 암벽에 조각 된 ‘12명의 지하세계 신’.

‘신들의 계곡’으로 불리는 야즐르카야 암벽에 조각 된 ‘12명의 지하세계 신’.

 
관련기사
기원전 14세기경 조성된 하투샤는 첫눈에도 웅대했다. 3500여 년 전 아나톨리아(현재 터키) 반도를 호령했던 제국의 면모를 돌아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평균 고도 1000m, 200만㎡에 달하는 구릉지대를 총연장 6㎞의 성벽으로 둘러쌌다. 10m 높이의 성벽 중간에 성문 5개를 냈고, 산비탈 암석지대에서 샘솟는 물을 급수로로 연결했다. 큼지막한 돌을 깎아 만든 저수조도 눈에 띈다. 최대 1만2000여 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투샤는 히타이트의 위엄을 드러냈다. 주변국이 범접할 수 없도록 성채 크기에 집중했다. 도성(都城) 최정상에 들어선 거대 성곽이 대표적이다. 길이 250m, 높이 20m의 석벽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렸다. 성밖 20㎞ 지점까지 이방인을 감시할 수 있다. 성채 아래에는 높이 3m, 길이 71m의 삼각 터널을 뚫어 통로로 사용했다. 샤흐너 단장은 “성벽은 3500년 전 건설된 모양 그대로다. 일부에선 방어용 기지로 판단하지만 그보다 왕국의 권위를 과시하는 종교적 상징물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성벽 위에는 ‘스핑크스의 문’이 있다. 원래 4개가 있었는데 두 개는 파괴됐고, 나머지 둘 중 1907년 초기 발굴 당시 독일로 넘어갔던 한 개가 2011년 현지로 돌아와 문화재 반환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기원전 1258년 오랜 전쟁을 마치고 작성한 카데시 평화협정문.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기원전 1258년 오랜 전쟁을 마치고 작성한 카데시 평화협정문.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했다.

하투샤는 ‘신의 도시’였다. 도성 안에 사원 31개를 세웠다. 당시 섬긴 신만 1000여 개다. 도성에서 2㎞ 가량 떨어진 야즐르카야에는 새해를 축하하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고, 왕의 즉위·죽음을 기리는 신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큼지막한 바위에 새겨진 온갖 신과 왕의 형상에서 권력과 영생을 희구해온 인류의 욕망을 되돌아본다.
 
히타이트인은 왜 수많은 신을 섬겼을까. 여기에 제국의 비밀이 숨어 있다. 흑해 연안에서 시작해 아나톨리아 반도를 점령한 하티족(히타이트 조상)은 토착민의 신앙과 풍속을 수용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강인욱 경희대(고고학) 교수는 “히타이트는 관용과 동화정책으로 제국을 완성했다. 다른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는 다민족 국가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했다.
 

히타이트는 오랫동안 잊혀진 제국이었다. 20세기 이후 이곳에서 나온 쐐기문자 점토판이 해독되면서 ‘전설’에서 ‘역사’로 편입됐다. 그간 출토된 2만5000여 점의 점토판 내용이 90% 정도 밝혀졌다. 이희수 한양대(문화인류학) 교수는 “히타이트인은 대부분 청동기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이 나중에 발명한 제철(製鐵) 기술은 요즘의 IT혁명을 뛰어넘는,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라고 말했다. 강인욱 교수는 “철기도 철기지만 히타이트는 전차(戰車)의 경량화에 성공했다. 병사 둘이 몰던 마차를 셋이 탈 수 있게 개량해 전투력을 키웠다”고 했다.
 
히타이트는 현재진행형이다. 샤흐너 단장은 “하투샤만 해도 50% 정도 발굴됐다”고 밝혔다.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500년 넘게 번창했던 제국이 갑자기 멸망한 원인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뚜렷한 약탈이나 대화재 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집트와의 오랜 전쟁, 지중해 해적들의 침공, 내부 권력투쟁 등이 몰락 배경으로 꼽힌다. 전호태 울산대(고고학) 교수는 “히타이트는 여성권리 보장, 사형제도 폐지 등 현대 국가의 면모를 일찍부터 보여줬다”며 “우리도 동북아에 국한된 시야를 넓혀 인류 문명의 시원을 밝히는 작업에 동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터키=글·사진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na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