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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6) “내 나이에 어울리는 볼륨은 몇 데시벨일까?”

중앙일보 2017.07.28 12:00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편집자>

 
 
거창까지 따라 내려와 제 나이를 망각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다 결국엔 사망해버린 23살 스피커의 생전 모습이다. [사진 조민호]

거창까지 따라 내려와 제 나이를 망각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다 결국엔 사망해버린 23살 스피커의 생전 모습이다. [사진 조민호]

 

인피니티 스피커, 엠프 볼륨 한껏 높였더니 고장나
일주일 동안 무리하게 힘썼더니 온 몸이 지끈지끈

나를 따라 이곳 거창까지 내려온 분이 계시다.
 
1994년, 내 이름으로 된 생애 첫 집에 입주하고 기뻐서
당시 삼 개월 치 월급을 탈탈 털어 들여놓은
인피니티라는 이름의 톨보이 스피커다. 스물세 살이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진갑 다 지난 분이시다.
앰프는 몇 번 바꿈질했지만 새로운 스피커를 들일 때도
이 분은 내치지 않고 새 스피커와 번갈아 가며 함께 들었다. 
나이가 있으니 새로 들어온 젊고 짱짱한 스피커와 비교되고 
한참 어린 나이의 앰프의 기에 눌려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내길래 
거창으로 내려올 때 서른 살이 넘은 중후한 빈티지 앰프와
짝을 맺어 여기에 모셨다. 황혼결혼을 한 셈이다.
 
그런데 젊은 스피커 옆에 있을 때는 영 꿇리는 소리를 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거창에서 이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
예전의 풍부하고 웅장한 소리를 내주시는 거다.  
늦은 나이에 새 서방을 만나 회춘을 한 걸까? 아니면
여기 음악 듣는 공간이 집의 내 방보다 제법 크고
볼륨을 높여도 윗집에서 전화가 오지 않는 산 속이라
음악을 크게 듣는 데 덩치 큰 스피커가 더 유리해서일까?
아~ 그동안 제 덩치에 어울리는 큰 소리 내지 못하고 있다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게 된 그 분의 재기가 눈물나게 기뻤다. 
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집사람 눈치만 보고 있었던 
지난 1년의 내 처지가 생각나 마음이 짠해졌다.
 
 
아마 수백 번도 더 들었을 들국화 1집. 지금의 전인권과 그 시절의 전인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낸다. 현명하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나이에 걸맞는 목소리를 장착한 그가 더 오래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 조민호]

아마 수백 번도 더 들었을 들국화 1집. 지금의 전인권과 그 시절의 전인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낸다. 현명하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나이에 걸맞는 목소리를 장착한 그가 더 오래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 조민호]

 
며칠 지내려 내려온 친구들도 그 소리에 놀란다.
“야~ 소리 죽인다. 좀 크게 틀어봐라. 더 크게~~~~!!”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볼륨을 60까지 올렸다. 
친구들이 환장한다. 
볼륨을 80까지 올렸다. 분위기가 이글이글 거린다.
이글스에 이어 산타나, CCR까지 불꽃 같은 소리를 낸다.
 
다음날 아침, 왼쪽 인피니티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앰프의 볼륨을 견디다 견디다 못해 스피커 유닛이 터져버렸고, 
왼쪽 스피커의 볼륨까지 떠맡았던 오른쪽 인피니티도 며칠 후,
사망하셨다.
 
“와, 일 잘하시네요~ 도시사람 같지 않네예.”
그 칭찬에 뒷산 소나무는 슥삭슥삭 금새 잘려 나갔고 
툭툭 낫으로 잔가지를 쳐내면 뗄감은 쌓여갔다. 
비료 포대를 번쩍번쩍. 내 걸레질에 정자마루는 반짝반짝 했다.
귀촌 일주일만에 내 척추근육과 삼두박근도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제 나이에 맞지 않는 목소리를 내면,
제 능력에 맞지 않는 힘을 쓰면, 
죽는 나이가 되었다. ㅋㅋ
 
 
가조면을 내려다 보고 있는 우두산의 이름없는 바위. 내가 듣는 음악이 이곳까지 들리는 걸까? 눈을 지긋이 감고 음악감상 중이시다. [사진 조민호]

가조면을 내려다 보고 있는 우두산의 이름없는 바위. 내가 듣는 음악이 이곳까지 들리는 걸까? 눈을 지긋이 감고 음악감상 중이시다. [사진 조민호]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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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호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필진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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