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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5) “얕으나 넓을래? 깊으나 좁을래?”

중앙일보 2017.07.25 12:00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편집자>
 
 
나와 다르게 꽤 깊어 보이는 용추폭포. 용추계곡의 끝머리에 있는데, 거창군 경계에 있는 함양군 안의면에 있다. [사진·조민호]

나와 다르게 꽤 깊어 보이는 용추폭포. 용추계곡의 끝머리에 있는데, 거창군 경계에 있는 함양군 안의면에 있다. [사진·조민호]

 
나는 얕디얕은 사람이다.
 
사진과 카메라를 좋아하고 라이트룸(사진을 후보정하는 프로그램)도 제법 다룬다.
아침엔 모차르트를 듣고 저녁엔 마일즈 데이비스와 노라 존스를 듣는다.
원두 로스팅은 하지 않지만 잘 볶은 케냐AA와 오버 로스팅 된 과테말라 안티구아의 미묘한 맛의 차이도 구별하며, 제법 맛있게 커피를 내릴 수도 있다.
빈티지 앰프와 스피커의 복잡한 시스템이 내는 묵직한 첼로 소리도 즐기지만
디지털 앰프와 작은 북쉘프 스피커에서 나오는 찰랑찰랑한 바이올린 소리도 좋아한다.
 
그러나~ 쩝.
내 카메라와 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고 친구들은 와~ 해주지만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과 린호프(어마어마하게 비싼 독일제 파노라마 카메라)에 비하면 유치원생 수준이다. (초등학생이라고 썼다가 유치원생으로 바꿨다)
내가 듣는 음악과 음악적 지식의 깊이, 내가 내린 커피 맛의 클래스, 
내가 보유한 오디오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전문가의 식견과 그 깊이에 비하면 여전히 엄마 품에 안긴 아기 수준에 머문다.
 
 
용추폭포 바로 위에 용추사가 있다. 명부전 앞에 놓인 돌에 쓰인 글이 마음에 들어온다. 탁 트이어 명백한가, 나는? [사진·조민호]

용추폭포 바로 위에 용추사가 있다. 명부전 앞에 놓인 돌에 쓰인 글이 마음에 들어온다. 탁 트이어 명백한가, 나는? [사진·조민호]

 
그렇다~ 쩝.
이처럼 다양한 내 취향과 취미와 관련된 지식은 보여줄 것도 없고 보잘 것도 없으며 
집 앞 고견천 시냇물 처럼 얕디얕다.
하지만 나는 얕지만 다양했던 내 젊은 날의 그 가벼운 취향들에게 감사하며 산다. 
지금처럼 한없이 주어지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깊으나 좁은 지식 보다 
얕지만 넓은 취향과 취미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미리 안듯이, 
뭐든 깊이 들어가려고만 하면 머리 아프다고 포기해버리고, 
처음에는 푹 빠져 지내다가도 금새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렸던 
내 부족한 인내심과 조급증에게 업고 다니고 싶을 만큼 고맙다. 
그리고 숱한 취미에 당연히 따르는 경비 지출에 잠깐의 잔소리를 곁들였지만
결국엔 너그럽게 결제해주었던 집사람이 고맙다.
 
 
합천댐 순환길에서는 운전이 힘들다. 봄에는 벚꽃이 눈길을 뺏고 늦은 오후에는 구불구불 강물이 발길을 잡는다. [사진·조민호]

합천댐 순환길에서는 운전이 힘들다. 봄에는 벚꽃이 눈길을 뺏고 늦은 오후에는 구불구불 강물이 발길을 잡는다. [사진·조민호]

 
자~ 오늘은 
미인산에 오를까, 용추폭포를 ND필터를 써 찍어볼까, 베토벤 현악4중주 전곡 듣기에 도전해볼까, 스포츠 모드에 놓고 합천댐 한 바퀴를 30분에 끊어 볼까, 
칼리타를 버리고 고노로 바꿔 커피를 내려볼까~.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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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 퇴직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이 없는 도시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이러다 죽는 날 아침에 “뭐 이렇게 빨라, 인생이?” 할 것 같았다. 경남 거창 보해산 자락, 친구가 마련해준 거처에 ‘포월침두’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평생 처음 겪는 혼자의 시간을 시작했다. 달을 품고(抱月) 북두칠성을 베고 자는(枕斗) 목가적 생활을 꿈꿨지만 다 떨쳐 버리지 못하고 데려온 도시의 취향과 입맛으로 인해 생활은 불편하고 먹거리는 가난했다. 몸을 쓰고, 글을 쓰자. 평생 머리만 쓰고 물건 파는 글을 썼으니 적게 먹어 맑은 정신으로 쓰고 싶은 글, 몸으로 쓰는 글을 쓰자,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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