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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무지카 문다나 - 고요의 음악

중앙일보 2017.07.25 02:15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여름 한낮이었다.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이었던가, 나는 몸이 아파 학교를 쉬고 누워있었다.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마당 화단의 꽃들이 햇빛에 밝았는데 나는 문득 벌들이 꽃 사이를 날아다니다 멈추곤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먼 데서 쓰르라미 소리도 들렸다. 이따금 지지배배 우는 새끼 제비들은 시끄러울 정도였다. 마루인가 덧문은 이따금 끼익하는 소리를 냈다. 큰길 쪽에서 행상의 노랫소리가 가까워지는 듯하다가 멀어졌다. 내 몸에서도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배의 꾸르륵거림, 관자놀이의 맥박이 베갯속을 건드리는 규칙적인 소리, 자세히 들으면 들리는 나의 호흡 등. 고요를 들은 첫 경험이었다.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자연·세상의 음악
여름철은 고요의 음악 즐기기 좋은 계절

이렇게 선명하지는 않지만 다른 기억도 많다. 연배 드신 이들이 기억하겠지만 한밤중 멀리서 울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 겨울밤 귀를 기울이게 하던 메밀묵 행상의 긴 외침,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새벽마다 먼 곳의 절에서 들려오던 종소리, 배롱나무가 붉게 핀 정자 근처 어디선가 끊어질 듯 말 듯 들리던 물소리, 여름밤 칠흑 같은 호수 어딘가에서 물고기들이 뛰어오르면서 내는 싱그러운 첨벙 소리, 그 소리와 함께 호숫가에 조용히 부딪혀 오던 작은 물결 소리.
 
꽤 오랫동안 나는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바람이 시원히 통하는 집은 아니지만, 여름이면 사방 창문을 열어 놓고 산다. 소리가 들어온다. 아파트란 건조한 곳이어서 소리 또한 건조하다. 좀 떨어져 있지만, 도로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솔직히 말하면 도로의 소음), 오후 늦게 놀이터에서 떠드는 아이들 소리, 이따금 반려견들이 짖는 소리, 다른 층 현관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주고받는 말소리, 그리고 이른바 층간 소음들(발소리, TV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등). 그래도 아파트 뒤편으로 빽빽한 나무들이 있어 서너 종류의 새들이 제법 들을 만한 소리를 낸다. 또 최근에는 매미들이 꽤 시끄럽게 울어대는데 큰 불평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소리는 소음으로 여기지 않는 듯하다.
 
도로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를 장마철 계곡 물소리쯤으로 여기려 하지만 (실은 음향적으론 꽤 비슷하다) 그래도 역시 너무 삭막한 듯해 풍경을 거실의 바람 잘 통하는 곳에 걸어 놓는다. 여행을 다니다 좀 새로워 보이는 것이 있으면 사오곤 해서 작은 종으로 된 것, 차임처럼 생긴 것, 나뭇가지로 된 것, 조개껍질로 된 것 등 7~8개가 걸려 있다. 바람이 불면 가벼운 놈부터 울리기 시작하고 바람이 세면 네댓 개 이상 울리면서 음악을 만든다. 바람의 음악이다. 풍경 소리는 울릴 때도 좋지만 끝날 때 더 마음에 들어온다. 가느다란 소리가 사라지면서 고요 속으로 내 귀를 이끄는 것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나만의 소리 세상에 몰두하는 것도 좋아한다. 주변 소리가 그저 그럴 때, 같은 공간에 있는 웬수 같은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방송을 틀어 놓고는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을 때, 그렇다고 그에게 항의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 혹은 대세가 그 소리를 용인하고 있어 내가 소수자임이 분명할 때 제격이다. 처음 워크맨이 나왔을 때 나는 대구의 대학교에 근무했는데 오고 가는 고속버스에서 자주 이어폰을 끼고 나 혼자만의 음악세상을 즐겼다. 그것은 나를 지켜 주는 방어막이었다.
 
번번이 잊어 실행 못 했지만 치과 치료를 갈 때 이 방어막을 가지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치과 치료의 날카로운 소리 고문 대신 음악 한 곡을 듣는 동안 치료가 끝나지 않겠는가. 변화 많고 풍부한 오케스트라 음향을 가진 스트라빈스키가 적당하리라 음악까지 선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 여는 계절이다. 귀를 열고 자연과 세상의 소리를 내 안에 들일 때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권한다. 자연과 세상이 주는 이 음악(musica mundana)을, 바다나 계곡 혹은 집이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자신만의 음악을 즐기시기를.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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