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새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 국내 시장서 뜨거운 반응
모래알 같은 개인에서 역사 문제로 관심 변화 담아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새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가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난봄 국내 판권 계약 단계에서 얘기됐던 것처럼, 신작은 하루키다운 면모를 두루 갖춘 모습이다. 그렇다는 것이 그의 작품을 기꺼이 따라 읽는 열혈팬, '하루키스트'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기사단장 죽이기』1권 표지.
그렇다고 소설의 인물들이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까지 포기하는 건 아니다. 나는 생존 요리의 달인이자 클래식 애호가, 자유연애주의자다. 수수께끼 같은 이웃인 멘시키는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화사한 꽃 같은 존재. 은색 재규어를 몰고 다니는 그는 패션 코디에 실패하는 법이 없다. 역사적 전망을 잃고 진지한 교양에서 멀어져 자족적 생존에 눈돌린 세대에게 댄디적 삶의 기술들을 가르쳐온 하루키 소설다운 면모다.
이들이 사는 세상에 균열을 가져오는 건 미세한 현실의 어긋남이다. 한밤중 잠을 깨우는 정체불명의 방울소리가 초자연적인 존재와 현상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환상 세계, 하루키 어드벤처로 인물들을 이끈다.
이전 작품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과 설정, 그러면서도 흡인력을 잃지 않는 특유의 문장과 구성을 통해 하루키가 전하고자 했던 이번 소설의 핵심 메시지는 제국주의 일본의 감추고 싶은 과오, 난징대학살과 관련 있다.
알려진 것처럼 소설 제목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에서 따왔다. 바람둥이 주인공 돈 조반니가 미모의 돈나 안나에게 접근했다가 그녀의 아버지인 기사단장, '콤멘다토레(Commendatore)'를 살해하는 대목이다. 소설 제목은 소설 속에서 그림 제목이다. 집을 뛰쳐나간 나는 미대 동기 아마다 마사히코 소유의 도쿄 외곽 빈집에 얹혀 살다 저명한 일본화가인 그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가 숨겨둔 그림을 발견한다. 이 그림의 제목이 바로 '기사단장 죽이기'다. 그림은 돈 조반니가 기사단장의 심장에 칼을 꽂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경악하는 돈나 안나 등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기사단장과 돈 조반니가 각각 누구를 상징하는지, 살인사건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소설의 핵심 주제다. 그 답은 2권의 후반부에 나오는데, 역시 난징대학살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설 제목이 그런 의미를 내포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소설의 목적성은 분명해 보인다.
하루키는 단순히 소설 집필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2월 말 소설 출간 직후 우익들의 문제제기로 과거사 논란이 불거졌는데도 자신의 소신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다. 4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국가의 집합적 기억이기 때문에 과거의 일로 잊어버리거나 슬쩍 바꿔치기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설 속에서 멘시키의 입을 빌려 "어쨌든 엄청난 수의 시민이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중국인 사망자 수가 사십만 명이라는 설도 있고, 십만 명이라는 설도 있지요. 하지만 사십만 명과 십만 명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던 대목을 연상시킨다(2권 88쪽).
이런 하루키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동안 하루키 소설은 전체보다는 개인, 공적 진정성보다 사적 진정성(평론가 신형철)에 신경 쓴 만큼이나 현실이나 실제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하루키 월드'라는 다분히 긍정적인 수식어는 역설적이게도 하루키 소설의 폐쇄성, 자족성도 건드린다. 신작은 밀실에서 다시 광장으로 나서는 하루키의 발걸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맨 마지막 64장에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비중 있게 다뤘다. 물론 이런 현실로의 전환이 처음은 아니다. 옴진리교 사건을 건드렸던 『1Q84』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다. 하루키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단골 수상한다는 체코의 프란츠 카프카상을 2006년 수상했다. 하루키는 작가 개인 차원의 노벨상 수상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일까. 문학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방식을 통해?
소설 속 도모히코가 천착했던 일본화(日本畵)의 기원과 역사에 대한 설명 내용도 흥미롭다. 우리의 한국화와는 또다른 느낌의 일본화는 19세기 메이지유신 때까지만 해도 확립된 미술 장르가 아니었다. 서양화가 물밀듯 밀려들어오자 대항마로 만들어졌다. 서양문명과 균형을 맞추는 일본 문화의 아이덴티티로, '국민예술'로 육성됐다. 그러다 보니 고유한 수법은 존재하지만 막연한 합의에 바탕을 둔 개념, 본래 정의된 바가 없는 형식이다(1권 177·178쪽). 일본에서 촉망받던 서양화가였던 젊은 시절의 도모히코는 오스트리아로 미술 유학을 떠난다. 한데 그가 유학 중이던 1938년은 '안슐루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유럽에 본격적인 피바람이 불던 시기다. 같은 해 동양에서는 난징대학살이 있었다. 와중에 도모히코는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한참을 은둔한다. 일본화로 '전공'을 바꿔 세상에 다시 나온다. 서양 것을 버리고, 급조됐을 망정 일본 것을 택한 것은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거나 뿌리는 허약하지만 기댈 것은 일본 것뿐이라는 갸날픈 희망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하루키 소설이 이런 '의미'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다. 하루키의 소설 문장은 최소한의 문해력(文解力)을 갖춘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듯 쉽고도 쉽다. 난해한 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관념을 뜻하는 '이데아'를 신장 60㎝ 가량의 작은 사람으로 형상화했다. 그의 최대 흥행작 『노르웨이의 숲』에서부터 그랬던 거지만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도 빈번하다. 1·2권 합쳐 1200쪽에 이르다보니 천하의 하루키 소설이라도 서사의 긴장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보여주겠다는 듯 자주 나온다. 심각한 주제를 품고 있지만 적당한 깊이에 특유의 가독성으로 무장한, 어쩔 수 없는 하루키 소설이다.
※참고도서: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남진우 『숲으로 된 성벽』, 신형철 '무라카미 하루키, 혹은 부인된 매개자'(계간 '파란' 2017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