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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 중 상가에 “철거” 스프레이 낙서...범인 알고 보니

중앙일보 2017.07.05 13:57
서울지하철2호선 서울대입구역 1번 출구 앞 상가 건물에 지난달 9일 ‘스프레이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초역세권 건물의 외벽과 창문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철거"라는 글씨가 적혔다. 입구 쪽에는 "안전상 출입금지"라는 내용의 현수막도 걸렸다.

 

영업 중 건물에 1주일간 '철거' 낙서
범인 추적했더니 바뀐 건물주
"대출이자와 안전 때문" 주장
상인들 "권리금 내고 입주했는데" 반발

상가 주인들은 아침에 출근해 흉물스럽게 변한 건물을 보고 기겁했다. 이 건물엔 편의점, 미용실, 치과, 분식점, 부동산, 술집 등 16개 상가가 정상영업 중이었다. 
 
안전상 출입금지라는 현수막에 손님은 뚝 끊기자 상인들은 경찰서와 구청 등에 신고했다. 구청은 건물주에게 행정지도를 해 6일만에 낙서는 지워졌다. 낙서가 지워지던 날 건물 관리인으로부터 ‘스프레이 테러범’이 누군지 알게 된 상인들은 다시 한번 기겁했다. 
 
바로 건물주였다. 현재 이 건물엔 "문재인 대통령님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입주 상인들이 호소하는 내용의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스프레이 테러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건물주 이모(63)씨는 지난해 7월 이 상가 건물을 190억 여원에 매입했다. 매입 자금은 대부분 대출로 충당했다.  A은행에서 이 건물을 담보로 건물 가액의 60%를 대출 받았고, 나머지 40%는 이씨가 소유한 다른 두 건물을 담보로 A은행에서 20%, B저축은행에서 20%씩 대출 받았다.
 
이씨는 상가 건물을 재건축해 지금보다 2~3배 높은 가격에 월세를 놓으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상인들이 가게를 비워줘야 했다. 은행에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이자가 수천만원이다 보니 이씨는 다급해졌다. 이씨가 자기 건물에 '철거' 낙서를 감행한 이유다.
 
이씨는 월세로 대출이자를 갚고 남은 돈으로 건물을 유지할 계획이었다. 빚만으로도 건물을 소유할 수 있는 투자 기법이었다.
문제는 이씨의 건물 투자로 세입자들은 한순간에 장사를 접고 점포를 빼야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이씨는 건물을 매입하고 모든 세입자에게 두 달 내에 점포를 비우라는 내용증명(명도 통고장)을 보냈다. 건물주는 "대출 이자로 경제적 곤란에 처해 있고, 건물이 노후돼 안전사고가 우려되니 재건축을 위해 신속히 가게를 빼달라"고 주장했다.
 
이 건물에서 20년 넘게 주점을 해온 육모씨는 "이 가게가 내 생업의 전부다. 갑자기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사정을 설명해도 건물주는 '법대로 하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주류판매점을 운영해 온 이모씨는 결국 먹고살기 위해 점포를 빼기로 했다. 그는 "권리금을 내고 입주해 장사를 해왔는데 전혀 보상 받을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나가라고 한다. 근처 점포에 권리금을 또 내고 입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임대 상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도 이런 경우 세입자의 영업권을 보호하지 못한다. 상가법 10조(계약갱신 요구 등)에서는 임차인이 임대차기간 만료를 6개월~1개월 앞둔 때에 계약갱신을 요구할 경우 임대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임대인이 건물의 노후·훼손 때문에 안전사고가 우려돼 재건축을 하려 하는 경우는 예외다. 
 
상가 세입자들은 "멀쩡히 정상영업을 해오던 상가에 건물주 이씨가 '안전상 출입금지' 현수막을 걸고 재건축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쫓아내려 한다"고 지적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재건축의 경우 입주자가 퇴거보상료나 재건축 후 우선입주권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상가법 개정안을 지난해 7월 발의했지만 법안은 계류 상태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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