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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딸아 미안하다

중앙일보 2017.07.04 02:29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그땐 까맣게 몰랐다. 오래전 취재차 만났던 일본인 교수와 지금의 내가 비슷한 걱정을 하게 될 줄은. 당시는 일본이 당장에라도 망할 것처럼 위기설이 나돌던 2002년 봄.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의 일원으로 도쿄를 찾았던 나는 일본 사회의 환부, 그중에서도 청년 실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다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됐다. 전문가 의견을 듣기 위해 문제의 교수를 인터뷰할 때도 그랬다. 이런저런 얘기 도중에 그가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며 난데없이 자기 집 속사정을 털어놓은 거다. 비싼 학비 들여 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스물여덟 살짜리 아들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직도, 결혼도 마다한 채 집에 눌러앉았다나. 스무 살만 넘으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게 당연시되던 일본에선 좀체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일자리 없는데 머릿수까지 많은 ‘에코붐 세대’로 낳아
취업·결혼 못한 청년들이 ‘기생 중년’ 된 일본 꼴 날라

그 집 아들 같은 젊은이가 급속도로 늘어나며 막 유행했던 일본식 신조어가 바로 ‘프리타’와 ‘파라사이토 신구루’였다. free(자유로운)와 arbeiter(근로자)가 합쳐진 ‘프리타’는 시간제 일자리로 근근이 먹고사는 이들을, parasite(기생생물)와 single(독신)을 결합한 ‘파라사이토 신구루’는 부모에게 얹혀 사는 성인 자녀를 각각 칭하는 말이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던 일본의 장기 불황이 빚어낸 그네들 청년층의 씁쓸한 현주소였다. 이후로도 경제난이 한참 더 지속돼 ‘잃어버린 20년’을 견뎌야 했던 일본은 최근엔 경기가 살아나며 청년 취업도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다.
 
문제는 우리 젊은이들이다. ‘고용 없는 성장’ 탓에 일자리의 씨가 마른 데다 하필 머릿수까지 많기 때문이다. 최악의 취업난에 시달릴 스펙을 날 때부터 갖춘 셈이랄까. 대통령이 지난달 추경 시정연설에서 ‘에코붐 세대’ 운운한 게 괜한 소리가 아니다. 전후(戰後) 출산율이 치솟으며 형성된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를 부모로 둔 만큼 그 자녀 세대 역시 숫자가 만만치 않다. 특히 향후 몇 년간 취업시장에서 사투를 벌일 25~29세 인구는 343만3000여 명으로 10년 아래 동생들에 비해 50만 명이나 많다. 저출산이 국가적 재앙이라지만 그 덕에 현재의 10대 이하는 취업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는 게 인구학자들의 전망이다.
 
이쯤에서 우리 집 얘길 해보자면 하나뿐인 딸아이가 바로 ‘에코붐 세대’다. 성격 급한 엄마 탓에 쓸데없이 세상에 빨리 나오는 바람에 피 튀기는 취업 전쟁을 치러야 할 신세다. 지난봄 대학을 졸업한 뒤 많고 많은 ‘취준생’ 대열에 합류한 딸애를 볼 때면 ‘나도 남들처럼 서른 훌쩍 넘어 출산했으면 고생 덜 시켰을 텐데…’ 하는 자책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저 아이가 취업도, 결혼도 안 한 채 내내 같이 살자면 어쩌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도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세대는 그나마 풍족한 부모들 연금에 기대 ‘기생’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나를 포함한 한국 부모들은 자기네 노후 대비조차 막막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파라사이토 신구루’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야마다 마사히로 주오대 교수는 국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20년 전의 청년들이 중년이 된 뒤에도 여전히 자립하지 못한 상태”라며 “부모가 죽고 연금이 끊긴 뒤 이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이 겪게 될 새로운 위기”라고 예견한 바 있다. 도무지 남의 일로 넘기기 힘든 무서운 경고다. 덧붙여 지인의 얘기를 전하는 걸로 우울한 칼럼을 마무리할까 한다. 얼마 전 대학생 아들이 요즘 노년층 생계 대책으로 급부상한 역모기지론(주택연금)을 불쑥 화제로 꺼내더란다. “그거 받다가 부모가 집값만큼 못 쓰고 죽으면 남은 돈은 은행이 가져가요? 아님 자식한테 돌려줘요?” 이런 궁리 하는 게 비단 이 집 아들만은 아닐 게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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