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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공부] 물밑 1000m 막장서 질식사·압사 … 일본 군함도는 ‘지옥섬’ 그 자체

중앙일보 2017.07.03 01:00 종합 16면 지면보기
‘큰별쌤’ 최태성 한국사 NIE
독도·동해 홍보에 앞장서고 있는 서경덕(43) 성신여대 교수는 5일 군함도(軍艦島)에 관한 영상 광고를 미국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실을 예정이다. 5일은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2년째 되는 날이다. 15초짜리 광고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하시마는 한국인 강제징용자가 100명 넘게 죽어 나간 지옥섬’이라는 내용이 담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2년
좁은 해저갱도에 누워서 석탄 캐다
한국인 징용자 100명 넘게 죽은 곳

일본, 폭력·수탈의 역사 감춘 채
‘근대화·산업화 성지’로 인정받아

이달 말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도 ‘지옥섬’으로 불린 군함도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한국인 징용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서 지난 2월 극우 성향의 일본 산케이신문은 “날조된 영화”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고, 류 감독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라고 반박했다. 같은 섬을 두고 왜 일본은 ‘산업화의 유산’으로, 한국은 침략 피해의 상징으로 기억할까.
 
 
일본 나가사키항 근해에 위치한 군함도(일본명 하시마). [사진 중앙포토]

일본 나가사키항 근해에 위치한 군함도(일본명 하시마).[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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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일본명 하시마(端島)는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 떨어진 곳에 있다. 남북으로 480m, 동서로 160m, 둘레 1.2㎞에 이르는 작은 섬으로 5회에 걸친 매립공사를 통해 세 배 정도 커졌다.
 
무인도였던 이 섬에서 1810년에 석탄이 발견되자 1890년 일본의 산업화를 주도하던 미쓰비시가 섬을 매입했다. 해저 탄광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섬 전체가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적 산업시설로 변모했다.
 
좁은 섬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아파트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섬의 외관이 일본 군함과 비슷하다고 해 군함도로 불리게 됐다. 패망 직전인 1945년 무렵엔 약 5000명이 거주했다.
 
해수면 아래 1000m의 해저 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품질이 매우 우수했다. 1810년 처음 석탄이 발견된 이후 1974년 폐광할 때까지 연료용 석탄과 제철용 원료탄 1570만t을 공급했다. 일본이 군함도를 “조선과 제철·제강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다”(나가사키시 홍보 홈페이지)고 평가하는 이유다.
 
 
군함도는 그러나 한국·중국 등 주변국엔 제국주의와 강제징용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선을 침탈하고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은 세계 대공황(1929년)을 맞아 ‘탈출구’로 침략과 전쟁을 선택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으로 전쟁을 확대했던 일본은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공포했다. 전쟁에 필요한 자원의 강제징발을 가능케 한 이 법을 통해 일본은 식민지이던 우리나라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했다. 지원병제·징병제를 도입해 우리 청년을 전쟁터에 끌고 갔고, 국민징용령을 통해 전쟁시설 건설에도 동원했다. 또한 여성들을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성노예 생활을 강요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1939년부터 45년 3월까지 일본·사할린·남양군도 등에 강제동원된 한국인은 72만여 명에 이른다. 징용된 사람들은 주로 작업환경이 열악한 탄광·건설현장·공장에서 일했다. 한국인 징용자들은 일본인의 절반도 되지 않는 4원 이하의 임금을 받았고, 그마저도 본인은 손도 대지 못한 채 ‘강제저축’됐다.
 
 
군함도에도 한국인 징용자가 있었다. 한국인이 처음 유입된 건 1917년으로 추정되며 37년 중일전쟁 이후 크게 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부터 45년 사이 약 800명의 한국인이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비인간적인 환경에 고통받았다. 해수면 1000m 깊이의 해저 탄광에서 가장 위험한 막장에 배치되기 일쑤였다. 높이가 50~60㎝밖에 안 될 만큼 비좁은 공간에서 누운 자세로 석탄을 캤다고 한다. 섭씨 40도가 넘는 탄광엔 바닷물이 스며들었고 갱내는 가스가 가득 차 폭발 위험도 컸다. 화장실도 없는 공간에서 근로자들은 하루 2교대로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제공되지 않았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병에 걸리거나 탄광사고·영양실조로 사망한 이가 많았다. 도망을 시도하다 익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86년 일본의 시민단체가 발견한 당시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한국인 122명이 사고사·질식사·압사 등의 이유로 사망했다.
 
2014년 일본은 군함도 등 규슈 일대 23개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유네스코에 신청했다. 신청 이유로 일본은 “일본이 비서구에서 최초로 산업국가가 돼 반세기 만에 제철·조선기술을 확립했다”고 제시했다.
 
이 중 군함도, 나가사키 조선소 등 7개 시설은 한국인 수만 명이 강제동원됐던 곳이다. 당시 일본은 세계문화유산의 등재기간을 1850년부터 1910년까지로 한정했는데 이를 두고 ‘조선을 강제병합한 시기를 제외시켜 논란을 피하려는 의도’라는 비판이 일었다. 한국·중국뿐 아니라 각국 역사학자도 비판했다. 세계 역사학자의 공동성명을 주도한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일본은 한국인 강제징용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규슈의 한 탄광 합숙소 안에 한국인 강제징용자가 남긴 글.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고 적혀 있다. [사진 한국근현대사사전]

일본 규슈의 한 탄광 합숙소 안에 한국인 강제징용자가 남긴 글.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고 적혀 있다.[사진 한국근현대사사전]

2015년 7월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들 시설의 세계문화유산을 최종 등재하는 결정문에 ‘각 시설의 역사 전체를 알 수 있게 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권고를 명시했다.
 
당시 일본 측 대표도 “한국인 등의 의사에 반해 가혹한 조건에서 노역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등재 이후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위원회가) 강제노역을 인정하는 건 아니다”(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관광지로 활용 중인 군함도의 어떤 안내판에도 강제징용 사실을 밝히는 문구는 찾을 수 없다.
 
일본은 여전히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을 보여 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근대화·산업화의 모습은 부각하고 그 과정에서 자행했던 폭력과 수탈의 기억은 지우려 애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런 양면적인 태도는 바른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다”는 말처럼 진정한 평화와 관용은 망각이 아니라 기억에서 시작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군함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한국), ‘날조된 영화’(일본). 이달 말 개봉 예정인 한 영화를 두고 한·일 양국 사이에서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일본 나가사키항 인근 군함도를 배경으로 ‘한국인 강제징용’이라는 아픈 역사를 다룹니다. 일본의 한 시민단체에 따르면 이곳의 지하탄광에서 사고사·질식사·압사한 한국인 강제징용자가 122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최소 800명의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이곳에 끌려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군함도는 2년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일본은 ‘산업화의 유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강제징용은 없었다’고 뻔한 거짓말을 합니다. 이처럼 일본의 역사 왜곡 망언은 여전합니다. 이번 ‘열려라 공부’에서는 군함도에서 벌어졌던 한국인 강제징용의 진실을 전합니다.
 
최태성 한국사 강사, 정리=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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