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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문학] 한국 로망의 기원

중앙일보 2017.07.01 01:55 종합 27면 지면보기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로망은 원래 로마의 말이라는 뜻으로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언어를 통칭하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그것은 소설일 수도 있고 드라마일 수도 있는 거대 서사의 한 종류다. 일반적으로 그 서사에는 고결한 주인공과 순결한 사랑과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 있어야 하고, 그 관계는 유기적이어야 한다.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 『아이반호』에서 기사 아이반호와 로위너 공주는 고결한 인간이고 그들의 사랑은 순결하지만 그들이 결혼이 흑기사로 변복한 사자왕 리처드 1세와 로빈 후드 일당에 의한 사회적 정의의 실현과 결합되지 않았더라면, 소설은 거대 서사의 미학도 위엄도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희 장편소설『세 여자』

식민지 시대의 서사에는 사실상 로망이 없다. 주인공들의 품성은 고결하지만 사회의 결함이 늘 개인의 인격을 허물고, 그들의 사랑이 순결하다 해도 이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자기 미래를 자신이 설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포함한 한국 근세의 역사에는 여러 개의 기원이 있다. 개항도, 한일병탄도, 3·1운동도, 해방도, 4·19도, 5·18도 모두 그 기원이다. 그러나 조선희 장편소설 『세 여자』(전 2권)는 식민지 시대 한복판의 가장 암울한 삶에 로망의 기원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로망은 본질적으로 지금 있는 세계와 아직 없는 세계의 접점에서, 실은 접점이라고 믿었던 지점에서 시작한다.
 
신작 장편 『세 여자』를 낸 조선희. 세상을 바꾸려 했던 여성혁명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중앙포토]

신작 장편 『세 여자』를 낸 조선희. 세상을 바꾸려 했던 여성혁명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중앙포토]

1991년 12월 박헌영과 주세죽의 딸이며 소련의 모이세프 무용학교 교수인 비비안나 박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그가 들고 온 몇 장의 흑백사진 가운데 식민지 조선에서 최초로 단발을 한 세 여자가 청계천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진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주세죽과 한정숙과 고명자, 이 세 여자는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같은 길을 걸어갔지만 저마다 운명이 달랐고 죽음의 자리가 달랐다. 박헌영·김단야·임원근 같은 혁명가들을 만나 때로는 그들의 애인과 아내가 되고, 때로는 그들의 동지가 됐던 세 여자는 한국 공산주의의 역사와 함께 살며 그 핵심을 관통하기도 하고 그 변두리에서 등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의 한복판에서 합쳐지고 엇갈리는 그들 세 사람의 운명이 로망의 기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삶과 사랑과 행복을, 심지어는 자신들의 인간적 품성까지 미래의 세계에 걸었기 때문이다. 로망에는, 다른 서사도 그렇지만 때로는 드러난 슬픔이, 때로는 감춰진 슬픔이 있다. 이 소설에는 두 슬픔이 함께 들어 있다. 현실의 삶은 처절했고 미래의 삶은 와야 할 길도, 가야 할 길도 끊겼기 때문이다.
 
한국 로망의 기원과 같은 깊이를 지닌 이 방대한 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 어렵다.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삶에 비극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순탄한 저자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사건이 붓끝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그 순탄함은 그러나 이야기를 둘러싼 전후좌우의 방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높은 통찰력에서 온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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