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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경찰이 헬기 훔쳐 베네수엘라 대법원 공습 … 자작극?

중앙일보 2017.06.30 01:05 종합 16면 지면보기
반정부군의 소행일까, 아니면 정부의 자작극일까.
 

파일럿 출신 액션배우 페레스
시위대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가디언, 정부의 음모 가능성 의심

전직 경찰이 경찰 헬기를 훔쳐 대법원을 공습하는 영화 같은 일이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졌다. 반정부 시위가 3개월째 이어지며 격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심장을 겨냥한 초유의 사건을 두고 루머가 횡행하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 등이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공습을 감행한 오스카르 페레스가 시위대의 영웅으로 떠오른 한편, 정부가 여론을 돌리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에 따르면 헬기는 27일 오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상공을 맴돌다 내무부 청사에 총격을 가한 뒤 대법원에 수류탄을 투하했다. 베네수엘라 정부에 따르면, 수류탄은 모두 4발이었으며 그중 하나는 불발됐다. 사상자는 없었다.
 
페레스는 ‘헌법 350조, 자유’ 현수막을 내걸고 공습을 감행했다. 사건 발생 후 페레스는 “우리는 군인, 경찰, 시민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이라며 “마두로의 폭압에 항거하고 ‘범죄 정부’를 처벌하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하는 5개짜리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5개 영상의 누적 조회 수는 하루 만에 2300만회를 넘겼다. 시민들은 “당신은 훌륭한 애국자”라는 댓글을 달며 열광했다.
 
페레스는 특수경찰 파일럿 출신으로 2015년 ‘서스펜디드 데스’라는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납치된 희생자를 구출하는 역할이다. 일부 외신은 그를 ‘베네수엘라의 람보’라고 표현했다.
 
 경찰 헬기를 훔쳐 대법원을 공습한 베네수엘라 전 경찰 오스카르 페레스(가운데). [사진 페레스 인스타그램]

경찰 헬기를 훔쳐 대법원을 공습한 베네수엘라 전 경찰 오스카르 페레스(가운데). [사진 페레스 인스타그램]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현 정권을 흔들려는 테러 공격”이라며 “즉시 테러를 감행한 이들을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페레스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력을 배치했으며, 문제의 헬리콥터는 카리브 해 해변의 외딴 지역에 버려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페레스가 어떻게 경찰 헬기를 탈취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드론 비행조차 금지된 주요 국가 기관 청사 위를 어떻게 헬기가 비행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가디언은 장기화한 반정부 시위에서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부가 사건을 연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헬기 공습 사건이 TV에서 보도되는 동안 친마두로 인사들이 장악한 대법원은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루이사 오르테가 법무장관의 지위를 박탈하고, 친 마두로 인사인 타레크 윌리엄 사브를 후임으로 임명하는 두 건의 판결을 승인했다.
 
이번 사건은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전 국민적 시위가 석 달째 이어지는 가운데 발생했다.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지난 3월 29일 야당이 장악한 의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 산하 헌법위원회가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삼권분립 원칙을 깼다는 비난을 받고 철회되긴 했지만 시민들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고 갈등은 장기화됐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올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720%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식량난, 의약품 부족으로 나라가 거의 마비된 가운데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거의 매일 열리고 있다.
 
현재까지 70명이 넘게 사망하고 1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페레스의 헬기 공습이 마두로 정권의 자작극임이 확인된다면 분노한 시위대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반대로 애국심으로 행한 일이라 해도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페레스 같은 전직 경찰이 살상무기로 정부와 맞선다면 그야말로 ‘내전’이 시작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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