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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종주국 일본 몰락 뒤엔, 한국의 한발 앞선 D램 투자

중앙일보 2017.06.23 01:00 경제 2면 지면보기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미국과 일본의 정부 관계자들은 매달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반도체 협정 개정’이 주제였다. 일본 반도체의 미국 시장 점유율이 너무 높으니 일본 시장 내 미국 반도체의 점유율도 10%에서 20% 정도로 올리자는 게 안건이었다. 당시 협상 자리에는 도시바·히타치제작소·NEC·도시바·후지쓰 등 일본의 반도체 메이커와 모토로라·마이크론 등 미국 회사의 책임자도 참석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은 거의 두 나라가 주름잡았다. 특히 88년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0%가 넘었다.
 

반도체 치킨게임 한·일전 역사
80년대까지 절반 넘던 일본 점유율
삼성 공세, 대불황 겹치며 시장 역전
후지쓰·도시바 등 잇따라 사업 철수
낸드플래시도 한국 독주 계속 예상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일본 반도체의 지위는 90년대 들어 위협받기 시작했다. 89년까지 일본의 도시바·NEC·미국의 TI사에 이어 4위를 기록한 삼성은 1990년 시장점유율 12.9%로 도시바 (14.7%)를 바짝 추격하며 2위를 기록했다. 급추격의 배경에는 반도체 사(史)를 바꿀 만한 ‘경영 판단’이 작용했다. 88년 당시 업계는 D램의 집적률 높이기 경쟁을 하고 있었다. 1메가D램까지는 칩의 평면에 셀을 더 많이 집어넣는 회사가 기술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4메가 D램부터는 집적도를 높이기 위한 입체 설계 기술을 적용해야 했다.
 
전 세계 업계가 이 ‘입체 구조’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웨이퍼 표면을 파내 아래쪽에 새로운 층을 만들고 셀을 집적하는 ‘트렌치 공정’과 층을 쌓아서 셀을 더 집어넣는 ‘스택 공정’이 새 기술의 후보들이었다. 트렌치 방식은 다소 안전하지만 밑으로 파낼수록 회로가 보이지 않아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졌다. 스택은 작업이 쉽고 경제성이 있지만 품질 확보가 어려웠다. 미국과 일본의 선발 업체도 어느 기술을 택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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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전자의 진대제(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대표)·권오현(현 삼성전자 부회장) 박사는 이건희 회장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트렌치는 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지만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그 속을 볼 수 있습니다. 트렌치는 검증할 수 없지만 스택은 검증이 가능합니다”. 이 회장은 스택 방식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거액의 투자도 뒤따랐다. 삼성전자는 91년 4500억원, 92년 8000억원을 쏟아부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투자액수였다. 결실은 곧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스택기술을 바탕으로 92년 D램 세계 1위에 올랐다. 반도체 시장 진출 10년만이었다.
 
90년대 중반 일본의 반도체의 몰락은 가속화했다. 당시 주력 제품인 D램(D-RAM)의 용도가 워크스테이션용에서 PC용으로 크게 바뀌었다. 미국의 반도체 업계는 인텔의 PC용 프로세서 ‘펜티엄’의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부활했다. 97년부터 ‘실리콘 사이클’(반도체 산업의 주기)의 대불황이 오면서 일본 업체들은 하나같이 업적 악화에 빠졌다. 급기야 2003년, 미쓰비시전기의 반도체 부문이 엘피다에 흡수됐다. 후지쓰는 1999년, 도시바는 2001년에 범용 D램 사업에서 철수했다.
 
반도체 종주국 일본과 후발국 한국의 지위 역전은 D램에 이어 낸드에서도 현실화했다. 삼성전자는 D램에서 쌓은 경험을 낸드플래시 분야에 적용했다. R&D에 거액을 쏟아부어 한발 앞선 기술을 개발한 뒤 대량생산으로 가격을 낮추면 다른 업체는 따라 올 수가 없었다. 2001년 ‘일본 반도체 기수의 자존심’ 도시바는 삼성전자에 낸드플래시 사업을 제휴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삼성은 독자사업화의 길을 선택한다.
 
삼성전자는 2002년 들어 낸드플래시에서도 1위로 도약한 뒤 한번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낸드플래시 기반의 차세대 저장장치인 SSD시장에서도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투자한 한·미·일 연합이 도시바 인수에 성공할 경우 낸드플래시 시장은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1, 2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반도체 산업은 라인 하나 증설에 5조원씩 들어갈 정도로 거액이 들어간다”며 “현재 일본의 경영인들 가운데에는 이같은 과감한 결정을 할 오너들이 거의 없다는게 약점”이라고 말했다. 30년이 지난 2016년,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7%까지 내려갔다. 한국은 D램과 낸드에서 각각 50% 이상의 점유율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박태희 기자 adp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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