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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부자가 되고 싶은가, 아이디어가 있는 박물관에 가라

중앙일보 2017.06.17 01:00 종합 14면 지면보기
원주 치악산 고판화박물관 한선학 관장 
한선학 고판화박물관장이 그가 가장 아끼는 소장품인 조선시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목판을 들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식 화로 외곽을 장식하는 사각모양으로 훼손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선학 고판화박물관장이 그가 가장 아끼는 소장품인 조선시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목판을 들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식 화로 외곽을 장식하는 사각모양으로 훼손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남녘에 자리 잡은 신흥 사찰 명주사는 절보다 박물관으로 이름이 났다. 국내 유일의 고판화박물관이 있다. 해발 600m 산자락에 있건만 매년 1만2000여 명이 다녀간다. 불교미술 전공자들의 필답 코스로도 꼽힌다. ‘고판화=명주사’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한선학(61) 관장은 “목판·판화·경전 등 소장품 6000여 점은 규모나 수준에서 중국·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국제고판화연구보존협회를 발족할 만큼 지명도를 쌓았다”고 말했다.
 

군종장교로 15년 복무한 승려
국내 1호 박물관교육학 박사 받아
21세기 불교는 문화를 껴안아야

목판·판화 등 6000점 수집
수집벽은 마약보다 더 강한 중독
불교 무소유와 배치돼 딜레마 겪어

국내 유일 고판화박물관 세워
고판화는 대중예술,인쇄문화의 꽃
디자인 요소도 강해 콘텐트의 보고

연평균 세 차례 전시 활동
매년 미술학도 등 1만2000명 찾아
25일부터 세계불교미술 탁본전 열어

한 관장은 스님이다. 그런데 군 장교처럼 머리를 기른다. 결혼을 하고, 자녀도 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태고종 스님이다. 시절 인연이랄까. 우연히 선택한 승려가 천직이 됐고, 또 우연히 사들인 불상이 박물관 설립까지 이어졌다. 오는 25일부터 10월 15일까지 ‘탁본으로 보는 세계의 불교미술’을 여는 고판화박물관을 찾아갔다. 사찰 중앙 큰 돌에 새긴 『잡보장경』의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중략)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백제 도미 부인의 정절을 묘사한 원판 부분을 판화로 찍은 모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백제 도미 부인의 정절을 묘사한 원판 부분을 판화로 찍은 모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불경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아주 편안하게 설명한다. 앞의 두 대목만이라도 실천했으면 한다. 그런 마음으로 유물을 모으고, 또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는 원(願)을 세웠지만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이왕 좋아서, 그리고 미쳐서 해온 일, 최선을 다하려 했다.”
 
미쳤다고 표현했는데.
“제 지난 인생이 다 들어갔다. 한두 점 수집품을 늘려가면서 ‘미쳐야 미친다’는 뜻을 실감하게 됐다. 수집벽(癖)은 중독 중에서도 가장 강한 중독이다. 마약중독보다 더하다고 한다. 인간의 마지막 집착과 같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소유인데, 승려가 이렇게 물건에 매달려도 되나 하는 딜레마도 겪었다.”
 
지금은 그런 모순에서 자유로운가.
“부처는 모든 괴로움은 소유에서 온다고 했다. 또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바로 중도(中道)다. 강렬한 집착은 무소유로 통한다. 이제는 다 버리고 갈 수 있다. 어차피 죽을 때 갖고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고판화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물론 컬렉션은 현재진행형이다. 박물관은 늘 새것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를 활발히 하고 있다.
“1년 평균 세 차례 한다. 작은 박물관에서 이처럼 꾸준히 전시를 여는 경우도 많지 않다. 수집의 목적은 공개다. 속된 말로 자랑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박물관을 세우는 거다. 그게 교육이 되고, 체험이 된다. 혼자 두고 보는 것은 사욕에 불과하다.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 2010년 한양대에서 국내 첫 박물관교육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중국 명나라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판화. 한국과 중국의 판화 교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국 명나라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판화. 한국과 중국의 판화 교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자가 되려면 박물관에 가라’고 했다.
“관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영어·수학을 못 해도 캐릭터 하나 잘 만들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뽀로로는 미국 디즈니에서 1조원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았다.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는 도서관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박물관이다. 저는 창의성 발전소라고 한다. 창조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모방에서 시작한다. 박물관에 많이 올수록 많은 자극을 받는다. 언젠가 분명 스파크가 튄다.”
 
사찰과 박물관, 선뜻 어울리지 않는데.
“문화의 시대다. 21세기 불교는 문화를 껴안아야 한다. 포교의 중심에 문화를 놓아야 한다. 박물관을 열면서 판화 체험교실을 개설했고, 2011년부터 템플스테이도 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을 보시(布施)라고 본다. 물질적인 것만 나눔과 베풂이 아니다.”
 
고판화는 일반에게 아직 낯선 편인데.
“고판화는 인쇄문화의 꽃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중예술이다. 불교·유교 등 전통사상의 핵심을 그림으로 집약해 보여준다. 원판을 대량으로 찍어 많은 이에게 나눠줬다. 고서 표지 문양을 찍는 능화판, 옛 선비들이 편지지로 즐겨 쓴 시전지, 일반 서민들이 애용한 부적 판화 등 종류가 다양하다. 디자인 요소가 강해 현대적 변용 가능성도 무궁하다. 한마디로 콘텐트의 보고다. 우리 박물관 소장품을 활용하면 디자인 콘텐트 10만 점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스님의 길을 걷게 됐나.
“1978년 군종 장교 시험에 붙으면서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는데, 그해 3수 끝에 동국대 불교미술과에 들어가 조각을 전공했다. 5월 입대 영장을 받았는데 군 예비승이 되면 입대를 늦출 수 있었다. 81년 말 양양 낙산사로 출가했고, 83년 중위를 달고 입대했다. 98년 중령 진급 때까지 15년 복무했다. 우연한 선택이 인생을 바꿔놓았다.”
 
처음엔 조계종 승려였다.
“군 생활 중 결혼했다. 당시 조계종에선 군승의 결혼을 허용했다. 조계종단에 남으려면 제대하면서 이혼을 해야 했다. 그럴 순 없었다. 군에서 나와 현재 땅에 사찰을 세웠고, 2003년 박물관도 열게 됐다.”
중국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든 ‘당시선화보(唐詩選畵譜)’ 판화. 도시 풍경을 그린 산수판화다.

중국 청나라 건륭제 때 만든 ‘당시선화보(唐詩選畵譜)’ 판화. 도시 풍경을 그린 산수판화다.

 
수집 초창기로 돌아가 보자.
“96년 국방부 법당 주지 시절 중국 안후이(安徽)성 구화산(九華山) 성지순례를 갔다. 인근 항저우(杭州) 골동품 야시장에서 법당에 놓을 도자기 불상을 3만5000원에 구입했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비슷한 불상이 1000만원이나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이 어려웠던 때였다. 수집에 눈을 떴다. 인사동에서 지장보살 목판을 1만원에 샀다. 소장품 1호다. 이후 중국을 시작으로 티베트·몽골·한국·일본 등 수집 범위를 넓혀갔다.”
 
돈이 많이 들어갔을 텐데.
“2년 후 중국에 갔더니 상황이 급변했다. 지금 아니면 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돈은 없었지만 인사동·장한평·답십리·청계천 골동품상을 뒤졌고, 중국을 오가는 상인에게서 정보를 구했다. 당시 1만원 하던 중국 유물 값이 요즘에는 100~200배로 뛰었다. 한국 것은 되레 값이 떨어졌지만….”
 
실례지만 재테크가 됐겠다.
“물건을 팔아야 재테크지, 그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언젠가는 모든 걸 물려주고 히말라야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 한때 인사동 사람들이 ‘이상한 스님이 돈도 안 되는 중국 목판을 사들인다’고 수군댔는데 요즘에는 되레 무릎을 치며 제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3년 전 중국에서 나온 82권짜리 『중국불교판화전집』 수록작 300점 가운데 우리 박물관 소장품이 100점 들어 있다.”
 
이번 전시를 설명한다면.
“중국 룽먼(龍門) 석굴,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한국 석굴암 등 세계문화유산 탁본이 중심이다. 올가을에는 제8회 세계고판화축제도 연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수집에 나선 지 20여 년 만의 성과다. 박물관을 열면서 승려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 같다. 34년 전 수계(受戒) 당시 큰스님이 말씀하신 ‘광도중생(廣度衆生)’, 즉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는 당부를 조금이나마 실천한 것 같다.”
[S BOX] 초등학교 때 최순우 선생 집에서 하숙, 문화재에 눈떠
“전생에서부터 박물관을 하라고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선학 관장은 스님답게 인연을 귀하게 여긴다. “지금 돌아보니 수집의 길에 들어선 첫 인연이 최순우(1916~84·사진)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최순우 선생은 자연을 닮은 한국미의 뿌리를 파고든 미술사학자다.
 
한 관장은 경북 청송 출신이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산골 소년이었던 그는 초등 5학년 때 경복고에 들어간 형을 따라 서울에서 하숙을 하게 됐는데, 그곳이 바로 최순우 선생의 집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셨어요. 사랑방 사방탁자에는 고서가 가득 쌓여 있었고 정원 뒤쪽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있었습니다. 대청마루에는 하얀 항아리가 여럿 있었는데, 아마 달항아리가 아니었을까 해요. 최 선생님 딸과 함께 항아리에 들어 있던 설탕을 몰래 꺼내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한 관장은 이른바 문자향(文字香)을 처음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여서 직접 가르침은 받지 못했지만 세상은 인연의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것 같다”며 “대학 시절 미술사학자 황수영(1918~2011)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최순우 선생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최순우·황수영 선생은 진홍섭(1918~2010) 선생과 함께 일제강점기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1905~44) 선생의 개성 제자 3인방으로 꼽힌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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