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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웹툰·일러스트 작가 3명 중 1명 성추행이나 욕설 경험...문화예술계 갑질 여전

중앙일보 2017.06.12 13:01
#1. 웹툰작가 A씨는 한 만화 포털회사와 2000여 만원에 연재 계약을 했다. 회당 50만원 가량. 경력이 많지 않은 A씨에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연재 횟수 10회가 넘도록 A씨는 아직 원고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회사 측은 클릭 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계약서에는 명확한 조항이 없는 조건이었다. 돈은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만화 캐릭터의 저작권은 회사 측이 갖도록 계약되어 있어 A씨가 다른 곳에 자신의 캐릭터를 사용해 연재하는 일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러스트 작가 80% 불공정 계약 강요 경험
4400억 수익에도 작가에겐 1850만원 지급한
'구름빵' 사건과 비슷한 관행 지금도 계속

 
#2. 교과서와 문제집 등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 김모씨는 지난해 한 교과서 디자인 하청업계 지인으로부터 "표지로 쓸 디자인 3개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업체는 김씨에게 계약서는 따로 보내지 않았다. 교과서가 채택돼 돈을 벌기 시작하면 비용을 주는 출판계 관행에 따른 것이다. 일이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김씨는 일러스트 작업에 착수한 2주의 기간 동안 100여 차례에 걸친 수정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독촉과 수정 요구에 김씨는 일을 그만뒀고, 출판사는 아무런 대가도 지급하지 않았다. 김씨는 "계약서도 없이 그림 하나에 10만원 받아 가면서 출판사가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림을 수정해줘야 하는 게 이쪽 업계 종사자들의 현실"이라고 했다.
 
두 사례는 서울시가 12일 공개한 웹툰, 일러스트 작가의 일상 중 일부다. 서울시는 834명의 예술인(만화ㆍ웹툰 작가 315명, 일러스트 작가 519명)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불공정 실태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공개했다. 
 
'갑'은 문화예술인이 생산하는 콘텐트를 유통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가진 각종 기업과 출판사 등이다. 이들과 계약을 맺은 만화ㆍ웹툰작가, 일러스트 작가 등은 불공정한 계약조건을 강요 당하는 '을'이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갑질 관행은 제대로 된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않거나 계약 때 일정금액만 받고 2차 콘텐트의 창작ㆍ사용권리까지 모두 넘기는 불공정한 계약(매절계약)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공정 계약조건을 강요당했다고 응답한 예술인 중 매절계약을 경험했거나, 부당한 수익배분 조항에 고통받고 있다고 답한 이는 각각 전체 응답자의 31.4%에 달했다. 
 
불공정한 계약에서 출발하다보니 콘텐트 제작자가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수익은 이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문화예술인들이 구조화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한 예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4400억원 대박을 낸 어린이 애니메이션 ‘구름빵’의 원작자인 백희나씨는 저작권료로 1850만원 밖에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후 그는 오랜 법정투쟁 끝에 어렵사리 자신의 저작권을 되찾았다. 구름빵 사건이 있은 뒤인 2015년엔 매절계약을 막는 저작권법 개정안(일명 구름빵 보호법)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2015년 문화·예술인들의 연소득은 평균 1255만원에 그쳤다.
 
겉으론 법에 따라 제대로 된 계약을 맺는 것 같지만 내용은 여전히 불공정한 경우도 여전했다.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당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만화ㆍ웹툰 작가는 36.5%가 “그렇다”고 답했다. 초기작이 인기를 얻어도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는 것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데뷔 당시와 동일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도록 한 자동연장 조항이 덫처럼 창작자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은 만화ㆍ웹툰보다 일러스트 분야가 더 열악했다. 일러스트의 경우 불공정한 계약조건 강요 경험 비율이 79%에 달했다. 유형별로 ‘과도한 수정요구’(23.6%)가 가장 많았고, 시안비(실제 작업 전 초안에 대한 대가) 미지급(20.2%)과 매절계약 강요(15.2%) 등이 뒤를 이었다.  
 
서울시 문화예술계 불공정 행태 실태조사 결과
 


만화·웹툰 디자이너일러스트 작가
불공정 계약조건 강요36.5%79%
성명표시권 침해16%34.5%
부당한 수익배분33%78.2%
창작활동 방해·지시·간섭20.3%22.7%
예술활동정보 부당이용9.5%29.3%
부당한 계약해지35.9%54.9%
 
 
   
자신의 노력 만큼 돈을 못버는게 전부가 아니다. 문화예술인들은 자신의 잘못 여부와 무관하게 일방적인 계약해지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만화ㆍ웹툰과 일러스트 분야 모두 90% 이상(만화ㆍ웹툰 90.2%, 일러스트 95.5%)이 ‘거래업체의 일방적인 통보, 폐업ㆍ파산, 담당자와의 불화 또는 교체’ 등으로 인한 계약해지를 경험한 바 있다고 답했다. 이들은 금전적인 갑질은 물론 욕설과 성추행 같은 인권침해까지 겪는 경우가 많았다. 조사 응답자 중 “욕설 및 인권무시, 성추행과 성희롱 등의 인권침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만화ㆍ웹툰은 30.8%, 일러스트는 36.0%에 달했다. 
 
뒤늦게나마 서울시가 문화예술계 불공정 행태를 개선하기 위해 나선건 반가운 일이다. 시는 지난 2월 문화예술인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는 ‘문화예술 불공정피해상담센터’를 개소했다. 또 이번 조사결과 드러난 불공정관행을 고칠 수 있도록 관련 법과 제도 개선 등을 관계 부처 등에 건의하기로 했다. 다음달부터는 문화예술가의 권리지킴이로 활동할 ‘문화예술 호민관’ 4명을 예술인 단체에 파견한다. 
서동록 서울시 경제진흥본부장은 “열악한 창작여건 속에서 불공정 관행까지 겪는다면 누가 창작활동에 나서겠느냐"며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영화, 방송, 미술 디자인 분야까지 실태조사를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준석 기자 seo.jun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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