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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국정원은 살아 있다

중앙일보 2017.06.12 02:37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직면한 가장 큰 고민은 아마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전면 폐지’일 것이다. 서 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 때 “민간인 사찰 등 정치와 완전히 단절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통 크게 주장했고 국정원장은 디테일을 얘기했지만 결이 다르다.
 

12년 전 ‘서민경제 현장’ 보고서
국내정보 수집은 이렇게 하는 것

결론적으로 국정원은 국내정치와 완전히 단절시켜야 한다. 그러나 국내정보와 단절되는 건 곤란하다. 실력 있는 정보 조직은 위기 예방, 국익 관리를 위한 국내정보 수집에 집중한다. 대신 사찰과 정권 봉사 논란에서 깔끔하게 벗어날 대통령·국정원장의 의지, 요원의 의식과 교육, 시스템 감시가 살아 있으면 된다. 개선하면 될 일을 왜 폐지하나. 문 대통령은 국정원의 개혁 전략을 짜는 서훈 원장에게 폭넓게 자유를 허용하는 게 좋다.
 
요새 노무현 정부에서 당·정·청 고위직에만 배포된 국정원 명의의 ‘최근 서민경제 현장 점검 결과’(2005년 4월)라는 보고서를 우연히 읽어보고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노 대통령이 틀림없이 읽었을 것으로 보이는 14포인트쯤 되는 큰 활자의 91쪽짜리 소책자다. 읽는 중간중간 울컥하거나 가슴이 먹먹해졌는데 12년 전 한국의 서민 상황을 묘사한 국정원 경제 보고서가 오늘날과 수치, 형태, 아픔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보고서의 첫 파트인 성남시의 ‘새벽 인력시장’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일자리를 구하는 비율이 50→35%(복정동), 75→60%(수진리 고개), 85→80%(모란 터미널)로 하락하였고 일자리 얻기가 힘들다 보니 (구인)차만 다가와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 정도다. ※아줌마끼리 일자리 트럭에 서로 앉으려고 머리채를 잡는 일도 발생.”
 
‘채용 시장’엔 안양 평촌에 살면서 제과점에서 근무하는 22세 여상 졸업생의 애환이 실렸다.
 
“일요일 빼고 매일 10시간 일하면서 수당을 포함해 월평균 80만원을 받는다. 50만원은 어머니를 드리고 10만원은 어머니 모르게 적금에 들고 나면 한 달 용돈은 20만원 정도이며 가끔 친구들을 만나 간식 사먹고 영화 보는 일이 유일한 소비임. ※만일 대통령께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부언.”
 
보고서는 이 밖에 ‘자영업자 종사자’ ‘전통시장 상인’ ‘운수업 기사’ ‘중소기업 근로자’의 목소리와 실상을 각각 전국에서 최소한 3곳 이상에서 수집해 소개하고 있다. 서울 운수업 현장의 경우 “지난 대선 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던 기사들이 최근 승객들에게 대정부 비난여론을 전파할 지경에 이르렀음”이라고 썼다. 여론의 반전(反轉)과 위기의 진원지를 실감나게 적시해 집권 세력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장면이다.
 
보고서는 “하반기부터 경기가 살아나도 서민들이 마지막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큼. 우선 생계유지의 한계점에 다가간 취약계층의 숨통을 틔워주는 대책을 서둘러 시행하여 정부의 각별한 관심과 희망을 보여줄 필요가 있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2005년 국정원의 현장 점검 보고서는 위기 예방과 국익 관리에 필요한 문제 제기, 대안 제시, 서민적 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인력이나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국토교통부·행정자치부·서울시청같이 부분적으로 연관된 정책 부서에선 꿈도 꾸지 못할 종합민원 혹은 국민고통 체험 보고서다. 문 대통령과 여야 국회의원,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지금 읽어 바로 실천에 옮겨도 손색없을 만큼 정확한 진단이다. 서민 현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통렬한 자성(自省)도 생길 것이다.
 
국정원은 국내정보 조직의 존폐보다 제대로 운용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순 없다. 이런 수준 높은 분석과 평가 보고서를 생산해 대통령과 기관 요로(要路)에 배포하고 필요하면 국민에게도 공개해 사랑받는 국정원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12년 전 익명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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