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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합숙시켜가며 사기 대출…국고보조금 13억여원 허공으로

중앙일보 2017.06.11 13:10
지난 2012년 노숙인 A(35)씨는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호남선에서 김모(48)씨와 처음 만났다.  
 
"여기서 이렇게 생활하지 말고 나랑 같이 갑시다. 잠도 재워주고 용돈도 줄테니까."  
 
김씨가 A씨에게 제안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A씨는 그날 저녁 김씨를 따라 인천의 한 빌라로 갔다. 15평 정도 되는 빌라에는 A씨와 비슷한 처지인 노숙인들 4~5명이 모여 있었다.
김씨가 불법 대출을 받기 위해 노숙인들을 합숙시켰던 인천의 한 빌라. [사진 성북경찰서]

김씨가 불법 대출을 받기 위해 노숙인들을 합숙시켰던 인천의 한 빌라. [사진 성북경찰서]

 
다음날부터 '교육'이 시작됐다. 김씨는 "우리가 가짜로 회사를 하나 만들었는데 회사명이 'OO물산'인다. 등록된 주소·대표자·전화번호 등을 알려줄테니 잘 외워두라"고 했다. 허위로 만든 재직증명서·근로소득원천징수서·급여명세서·전세계약서도 쥐어줬다. 그걸 그대로 은행에 가져가 근로자 주택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오는 것이 A씨와 다른 노숙인들의 임무였다.  
 
은행의 대출 심사 과정은 서류만 제대로 마련돼 있다면 크게 까다롭지 않았다. 은행원은 등록된 대표 회사 전화번호로 통화만 한 차례 한 뒤 대출금을 내줬다. 그렇게 대출에 성공하면 1명 당 200만원 정도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이런 방식으로 2012년 1월부터 지난 3월까지 고속터미널이나 서울역, 천안역 등지에서 노숙인들을 모집, 이들 명의로 유령법인을 설립해 총 13억4000만원의 국고보조금을 챙겼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김씨와 그의 공범들을 비롯해 김씨 일당에게 명의를 빌려준 노숙자 17명 등 28명을 붙잡아 18명을 구속했다고 11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노숙인 명의로 유령법인 10여 개를 만들어 한 곳당 4~5명씩 노숙인을 근로자로 등록해 대출금을 가로챘다. 근로자 전세자금 대출은 국토교통부가 무주택 근로자들에게 담보 없이 시중 이자보다 낮게 대출 해주는 제도다. 경찰 측은 "은행에서는 대출금이 '은행 자금'이 아니다보니 대출 심사에 허술한 면이 있었다. 실제 사업장이 있는지 정도만 은행이 제대로 확인했어도 거짓말이 충분히 들통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노숙인 명의로 제2·3 금융권 소액대출을 받거나 유령법인 명의로 중고차를 매입해 되파는 등의 방식으로도 수억 원을 챙겼다. 경찰은 이번 범행과 관련된 유령법인 15개를 추가로 발견해 여죄를 수사 중이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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