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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정의 향한 열망이 과학적 태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

중앙선데이 2017.06.11 01:43 535호 26면 지면보기
[CRITICISM] 요즘 불고있는 과학 열풍, 왜?
최근 들어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알파고의 등장, ‘인터스텔라’ ‘마션’ ‘그래비티’ 등 SF영화의 인기 등에 힘입어 과학 관련 서적도 크게 늘어났다. [사진 교보문고]

최근 들어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알파고의 등장, ‘인터스텔라’ ‘마션’ ‘그래비티’ 등 SF영화의 인기 등에 힘입어 과학 관련 서적도 크게 늘어났다. [사진 교보문고]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비합리적 분위기에 질린 대중
아는 것 증거 들어 설명하는
과학적 태도와 본질 동경하게 돼

정재승·이정모·김대식 등 소통 앞장
과학자·대중 눈높이 차이도 줄어

 
1957년 보건사회부가 발표한 어린이헌장의 제8항이다. 1988년 재개정될 때에도 이 문구는 표현만 약간 바뀌고 살아남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10살에 불과한 신생국가였지만 과학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에게 과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힘과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가 설치된 것은 1941년이나 되어서였다.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조선이 병참기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과학기술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경제개발계획의 핵심목표로 삼았다. 더구나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과학기술은 필수였다. 군 출신 박정희가 과학자들에게 군 면제의 특혜까지 준 것을 보라. 과학 기술은 박정희 정권의 종교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1970년대 많은 아이들은 과학자의 꿈을 꾸었고, 똑똑한 아이들이 종종 이공계로 진학했다. 80년대 대학입시 이공계 수석이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로 진학하는 것은 흔한 일이기도 했다. 아이러니지만 이때 과학기술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게 되며, 이는 2000년대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당시 과학기술은 애국이자 세속적 성공의 지름길로 보였다. 이렇게 과학은 엘리트의 학문으로 여겨지며, 대중으로부터는 멀어진다.
 
 
지금 일고 있는 과학 붐의 정체는?
지난 5월 서울 노원구에 개관한 서울시립과학관에서 관람객들이 과학 체험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5월 서울 노원구에 개관한 서울시립과학관에서 관람객들이 과학 체험을 하고 있다. [뉴시스]

요즘 과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출판시장의 온도가 최저치를 갱신하며 냉각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과학책의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 각종 언론매체의 칼럼, 심지어 각종 TV 프로에서도 과학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 있네’는 지난 4년 동안의 누적 다운로드 수가 2200만 회에 달한다고 한다.
 
고등학생들의 이공계 기피도 줄어들고 있다. 이공계 출신의 취업이 유리하다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라지만 말이다. 물론 과학이 정말 뜨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보려면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할 거다.
 
지금의 과학 붐의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몇 년간 굵직한 과학 이벤트가 많았던 때문일까. 2013년 3월 ‘신의 입자’(신의 작명이다!)라 불리던 힉스 입자가 발견되었고, 그 해 노벨 물리학상으로 이어졌다. 2014년 11월에는 과학 매니아나 좋아할 법한 하드 SF영화 ‘인터스텔라’가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2015년은 일반상대론 탄생 100주년을 맞는 아인슈타인의 해였는데,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2016년 2월 중력파검출이 발표되었다. 노벨상은 시간문제다. 불과 그 한 달 후인 3월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는다. 이제 인공지능은 대중의 호기심을 넘어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이다.
 
이런 사건들은 분명 과학 붐을 점화하는 역할은 했겠지만, 그 자체로 연료가 되기엔 부족하다. 노벨상이야 매년 수여되는 것이고, 일상과 관계없는 힉스 입자나 중력파가 일반인에게 다 무슨 소용이랴. 영화 한 편의 흥행이 이유라면 이거야말로 반짝 인기에 다름아닐 거다. 지금의 과학 붐이 실체가 있는 거라면, 그것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내의 과학소통은 전문가인 과학자가 비전문가인 대중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형태였으며, 그 대상은 주로 중고등학생이었다. 당시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와 이에 대한 정부의 고민과도 무관치 않을 거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는 계속되었고, 이처럼 가르치는 방식은 (학생이 아닌) 일반인에게는 역효과마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과학소통에 있어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자와 대중 사이의 높이 차가 부쩍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정재승·김대식과 같이 인문학의 언어로 말을 하는 과학자(필자도 포함된다!), 서민·김범준·이정모와 같이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과학자, 원종우·조현욱과 같이 일반인과 과학자를 매개해 주는 전문 소통가의 등장이 주요했다고 생각한다.
 
소통의 주된 대상도 중고생에서 성인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과학소통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긴밀한 관계망이 생겨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학창시절 이과를 선택했거나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적극 지지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인문서적을 주로 탐독하던 독자층이 과학책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이자 사고방식
서양의 인문학은 그리스 고전의 재발견에서 시작됐다. 그리스의 인간중심 사상은 신을 중심에 두었던 중세 기독교사회에 균열을 일으켰다. 근대과학 역시 이 균열에서 탄생했으나, 곧 인문학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흔히 과학이라고 하면 의심이나 합리성을 떠올리지만, 이들은 과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철학이 어디 있으랴. 수학은 물리학의 언어일 뿐 아니라 철학의 이상(理想)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이 ‘객관적이고 재현가능한 물질적 증거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분명 인문학과 차별성을 갖는다.
 
지구는 타원 궤도를 따라 태양 주위를 돈다. 누구라도 망원경으로 면밀히 관측하고 분석하면 (쉽지는 않지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과학의 객관성이다. 뉴턴이 살던 시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며칠 후에 다른 이가 해 봐도 같은 결론이 나온다. 재현가능성이다. 타원 궤도를 내놓는 이론은 옳고, 그렇지 못한 이론은 틀리다. 이처럼 이론의 옳고 그름을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과학의 진정한 힘이다.
 
과학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면 “모른다”고 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여타 학문과 비교할 때 꽤나 특별한 태도다. 많은 종교와 철학은 자신들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든 정합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인정한다. 우주는 빅뱅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진화했지만, 최초의 생명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지구 이외의 장소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태도는 안다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뒷받침할 물질적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빅뱅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138억 년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빅뱅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단지 우주가 팽창해 왔다는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보면 결국 우주가 한 점에 모이게 될 거다. 이게 전부다. 우주 팽창도 매우 기술적인 증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만약 이런 증거들 가운데 일부가 오류라고 밝혀지면 빅뱅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게 된다.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 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 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꿈꾸며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비합리적, 비민주적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상식과 정의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적 태도도 갈망의 대상일 수 있을 거다.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며 물질적 증거를 보여 달라는 사람에게 ‘종북좌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갈릴레오에게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중세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과학이 보여 주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사실들이 암울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이것을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신비와 경이야말로 무엇이든 시작하는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법이니까.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의 도구로 과학기술을 수입했다. 이때 과학적 태도와 사고방식이라는 옵션은 누락되었던 것이 아닐까. 헌법 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를 봐도 알 수 있다. 요즘 일고 있는 과학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과학이 가진 보다 본질적인 (인문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만한) 측면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바람이자 조심스런 추측을 해 본다. 지금의 과학 붐이 한 때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김상욱 카이스트 물리학박사. 물리연구 외에 과학소통에도 힘쓰고 있다. 아태이론물리연구소 과학문화위원장, JTBC ‘김제동의 톡투유’ 고정 패널로 활동 중이며, 경향신문·스켑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과학하고 앉아있네 3, 4』『김상욱의 과학공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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