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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시중쉰은 제갈량보다 더 지독한 놈”

중앙선데이 2017.06.11 01:08 535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33>
1 서북국 서기 시절, 위문단 일행을 맞이한 시중쉰(왼쪽 넷째). 1951년 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1 서북국 서기 시절, 위문단 일행을 맞이한 시중쉰(왼쪽 넷째). 1951년 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은 한반도로 떠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의 뒤를 이었다. 2년간 서북(西北)의 군정(軍政)을 주재했다.

펑더화이 이어 서북 군정 주재 시중쉰
소수 민족 상층부 포섭에 성공
중공 당중앙도 시중쉰 극찬
베이징 입성 후 낯선 여인 방문 받아

 
서북은 여러 민족이 뒤엉켜 사는 지역이었다. 종교도 복잡했다. 민족과 종교문제 해결이 관건이었다. 시중쉰은 서북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다웠다. 문제 해결을 위해 근신(謹愼)과 온진(穏進)을 강조했다. “군중의 갈채에 현혹되지 마라. 독이 들어 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절대, 강제적인 방법을 취하지 마라. 돼먹지 않은 명령으로 강행 하려다간 불신만 살 뿐, 될 일도 안 된다. 소수민족이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민족주의라는 어설픈 병이 도지지 않도록, 군중들을 토닥거려야 한다.”
 
관철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소수민족은 윗사람 말을 잘 듣는다. 각 민족의 상층부를 공략해라. 종교 지도자들은 통일전선 공작을 통해 우리 편으로 만들어라. 조력자가 증가하면, 거부세력은 방치해도 된다. 저절로 힘이 빠진다.”
 
시중쉰이 지휘하는 중공 서북국은 소수민족 상층부 포섭에 성공했다. 한때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골칫거리였던 마부팡(馬步芳·마보방) 추종자들의 반란도 매끄럽게 처리했다. 마부팡은 회족(回族) 명문 출신이었다. 일가친척들이 광활한 서북의 산간과 황토지역을 지배했다. 마가군(馬家軍)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마부팡은 마가군의 상징이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마부팡을 적절히 이용했다. 국민정부 서북군정장관에 임명하는 등 하느라고 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마부팡은 무력과 재력에만 의존하는 얼치기 군벌이 아니었다. 행동은 거칠어도, 어릴 때부터 유학(儒學)으로 무장된 지식인이며 문화인이었다. 국민당 패망 직전, 대만으로 가자는 장제스의 손길을 뿌리쳤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한 마부팡은 장제스에게 무슨 험담을 퍼부을지 모를 기세였다. 장제스는 서북지역에 미치는 마부팡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부팡을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사에 임명했다. 그냥 대사가 아니라 종신직 대사라며 특사까지 파견했다. 마부팡은 속 편하게 여생을 마치기로 작정했다.
 
2 마부팡은 생긴 것과 다르게 문화 수준이 높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국민정부 서북 군정장관시절의 마부팡. [사진 김명호 제공]

2 마부팡은 생긴 것과 다르게 문화 수준이 높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국민정부 서북 군정장관시절의 마부팡. [사진 김명호 제공]

신중국 선포 2개월 후인 1949년 12월, 마부팡의 추종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스탈린 생일잔치 참석차 모스크바에 가 있던 마오쩌둥은 기겁했다. 서북국 제1서기 펑더화이에게 당장 진압하라며 노발대발했다.
 
펑더화이는 “포위만하고 공격은 자제하자”는 시중쉰의 직언을 존중했다. 반란군 지휘관들은 주변지리에 익숙했다. 포위망을 뚫고 칭하이(靑海)성 앙라(䀚拉)로 도망쳤다.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던 앙라의 12대 통치자 샹첸(項謙·항겸)에게 다량의 무기와 탄약, 마필(馬匹), 금은보화를 안기며 반란을 종용했다. 샹첸은 중공 중앙정부에서 이탈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공구국군’을 결성했다. 시중쉰은 동요하지 않았다.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간, 17차례에 걸쳐 서북지역의 성(省) 간부와 티베트 활불(活佛) 등을 앙라에 파견해 샹첸을 회유했다.
 
샹첸은 막무가내였다. 시중쉰은 군대를 동원했다. 엄포만 놓고 공격은 하지 않았다. 2개월 후 샹첸은 제발로 투항했다. 서북 군정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시중쉰에게 할 말이 있다”며 벌떡 일어섰다. “시중쉰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와 동포들을 사지에서 구해줬다. 시중쉰이 아니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땅에 굴러다닐 뻔했다.” 베이징의 당 중앙은 시중쉰의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마오쩌둥도 극찬했다. “제갈량보다 더 지독한 놈이다.”
 
3개월 후, 마오쩌둥은 당과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가오강(高崗·고강), 라오수스(饒漱石·요수석), 덩즈후이(鄧子恢·등자회)등 지방 중요지도자들을 베이징으로 불러올렸다. 시중쉰이 빠질 리 없었다. 서북국이 작은 송별회를 마련했다. 시중쉰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속내를 털어놨다. “나는 서북 인민들과 깊은 감정을 쌓아 왔다. 서북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여러분들과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는 새로운 일하며 단련 받으라는 마오 주석의 분부에 충실하겠다. 서북 5성(省) 주민과 동지들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서북 5성은 여러 민족의 이해가 얽히고 설킨 지역이다. 각 민족의 풍속과 습관, 종교와 신앙을 존중해라. 민족, 종교 지도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눠라. 권한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라. 우리는 오랜 전우들이다. 못할 말이 없는 사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를 비판해라. 나도 너희들의 착오를 발견하면 못 본 체 하지 않겠다.”
 
시중쉰은 경호원 한 명만 데리고 서북을 떠났다. 5마진경(五馬進京), “말 다섯 마리가 베이징에 진입했다”며 온 중국이 떠들썩했다. 다섯 명 중, 시중쉰이 39세로 제일 어렸다.
 
베이징은 서북과 차원이 달랐다. 도처에 함정투성이였다. 하루는 낯선 여인의 방문을 받았다. 류즈단(柳志丹·유지단)의 동생 징판(景範·경범)의 처였다. 고난의 빌미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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