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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살아서 겪는 죽음

중앙선데이 2017.06.11 00:51 535호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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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불우했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떠났다. 숙부네 집에 얹혀살면서 인쇄 견습공 일을 하던 소년은 열여섯 살 때 처음 여행을 한다. 충동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오는데 성문이 닫혀 있었다.
 

여행의 어원은 아이 낳는 '고생'
체험 통해 자아 고쳐 쓰는 기회
루소·칸트·카프카·베케트도
걸으면서 생각 집약하고 글 써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 야훼의 명령을 받고 기꺼이 집을 나선 아브라함처럼, 어떤 운명을 느낀 소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길을 떠난다.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던 소년은 가톨릭 사제의 도움을 받아 토리노로 향한다. 그로부터 소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관 주인과 첫사랑에 빠지고, 부유한 귀족 가문에 하인으로 취직도 한다. 타고난 영민함으로 일 처리를 잘한 덕분에 하인에서 비서로 막 승진한 참이다. 창창한 날이 소년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소년은 그 순간, 또다시 여행의 운명을 느낀다.
 
“잘 있어라, 도시여, 왕궁이여. 야망이여, 허영이여, 사랑이여.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온갖 야심 찬 모험에 대한 희망이여. 잘 있어라. 이제 나는 탈출구를 찾아 짐은 가볍지만 환희로 충만한 가슴을 안고 떠나노라. 화려한 계획을 포기한 채 오로지 여행의 행복만 만끽하기 위해 길을 떠나노라!”
 
이후로 소년의 삶에는 정착이 없었다. 알 수 없는 충동이 소년을 도시 바깥으로 내몰았다. 여행은 습관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삶의 자리를 끝없이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간의 정착이 끝나고 또 다른 곳으로 여행하기를 거듭할수록, 그의 내면은 부풀어 올랐다. 넉넉함은 온 인류를 껴안고 깊이는 삶의 심연에 닿았다. 나중에 여행자로서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유랑하는 삶이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바로 루소다. 『여행의 철학』에서 읽은 이야기다. 사색의 학문인 철학과 육체의 단련이 여행은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제대로 된 사상치고 연구실에서 태어난 것은 거의 없다. 칸트는 매일 세 시간씩 산책하면서 사유를 집약했고, 베케트는 30km씩 걸으면서 글을 썼으며, 카프카도 휴가 때는 일고여덟 시간씩 행군을 즐겼다. 걸으면서 하는 생각만이 세상을 혁명할 수 있다. 영원한 이방인만이 대지의 비밀을 마주칠 수 있다.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 없이 어떠한 사상도 태어나지 않는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에서 “문장은 다리로 쓰는 듯싶다”고 이들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사상은 생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리를 육체에 새기는 고행 없는, 진리와 한 몸이 이루려는 실천 없는 사유란 한낱 사탕 바른 혀 놀림에 지나지 않는다. 한 해에 수없이 주고받는 논문들의 운명을 보라. 마지막에는 거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런데 여행 한번 안 가 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올 여름 여행 계획도 이미 짜 두었다고?
 
여행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아무도 여행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여행(travel)의 어원인 라틴어 트라바일(Travail)은 고생을 뜻한다. 그냥 고생이 아니다. 신이 여자에게 내린 약속, 즉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고 할 때의 고생, 즉 산고를 말한다. 자기 안에 타자를 받아들여 생명을 낳는 일이다. 참기 힘든 고통의 선언이며, 위대한 모성의 선포다. 다녀온 후에도 ‘여자’가 되지 못했다면, 아마도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단계로 나눈다. ‘여행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가 가장 낮다. ‘세상에 나가서도 자신만 보는 자’가 2단계, ‘세상을 관찰해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가 3단계다. 여기까지는 여행을 자처하기 부끄럽다. 마실 구경이나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
 
4단계는 ‘체험한 것을 자기 속에 데리고 와서, 지속해서 가지고 있는 자’다. 진리가 자기 안에서 부화하는 것, 즉 내면에서 깨달음이 일어서는 단계다. 마지막 5단계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동화한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행동이나 작품에서 반드시 되살려야 하는 자’다. 집 떠난 부처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후에 소를 타고 시장을 향하고, 광야를 떠돌던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되살린 후 곧바로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궁극이다.
 
호메로스는 말한다. “대담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살아서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한 번 죽는데 그대들은 두 번 죽는 셈이네요.”
 
진정한 여행은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 죽는데, 두 번 죽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몸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말처럼, 인간이 모두 한 번만 죽는 것은 아니다. 육체는 어쩔 수 없지만, 자아는 여러 번 고쳐 쓸 수 있다. 산고를 견딜 만큼 운명을 사랑한다면 기적은 늘 일어난다. 문학을 보라. 길가메시도, 오뒷세우스도, 단테도, 바리공주도 죽음을 겪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을 수 있다. 그러니 인생을 후회하지 말라.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책하지 말라. 육체에 숨결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인생은 바꿀 수 있다. 여름이다. 그러니, 자, 모두 나가자.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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