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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우렁이의 사랑법

중앙선데이 2017.06.11 00:38 535호 29면 지면보기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D H 로렌스는 어느 날 아이의 손을 잡고 정원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아이가 물었다. “왜 나무들은 온통 녹색이죠?” 로렌스는 햇빛이 식물 안에 저장되었다가 녹색 잎사귀로 변하는 것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가 다시 물었다. 로렌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나무들은 그냥 녹색이니까 녹색인 거야.” 그제야 아이는 흡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설명이 맘에 드네요. 다른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게 설명한단 말이야. 아저씨는 아주 간단하게 답해 주시네요. 나무는 그냥 녹색이니까 녹색인 거라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아이들에게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온통 기적으로 충만하니까.
 
어른들은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이성과 합리와 숫자의 굴레에 붙잡혀 살아가는 어른들은 ‘왜 살아야 하나?’를 묻는다. 성서의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 ‘왜 죄 없는 내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를 묻기도 한다. 또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 ‘도대체 이 무의미한 삶을 왜 지속해야 하는가?’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없을 때 하나뿐인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다. 하여간 ‘왜 사느냐?’는 물음은 인류가 천년만년 되뇌어 온 물음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하루 견뎌야 하는 삶이 고단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괴로운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중세의 수도승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명징한 잠언을 만났다.  
 
“왜 사느냐고 묻는 자에게,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산다고 대답하는 것 외엔 별 도리가 없다. 삶이란 그 자체의 이유 때문에 사는 것이다. 삶에는 왜가 없는 것이다.”
 
“삶에는 왜가 없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오래된 삶의 습성에 젖어 산다. 그러나 오랜 습성에만 젖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불행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습성에 젖어서 사는 삶은 타성의 삶이요, 노예의 삶이 아니던가. 거기에는 진정한 기쁨도 희열도 없다.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삶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삶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원동력, 그것은 사랑이다. 태양·공기·물·바람·흙, 매일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는 식물, 동물 등은 우리 생명을 존속하게 하는 존재의 기반이 아니던가. 그래서 어떤 시인은 우주가 사랑의 옷감으로 짜여져 있다고 노래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짜여진 직물과 같다.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해질녘, 천둥지기 논들이 있는 농로를 걸었다. 모내기가 끝나 초록 기쁨이 초록초록 자라는 논배미마다 우렁이가 까 놓은 알들이 딸기 모양으로 볏잎에 붙어 있었다. 이제 곧 우렁이들은 알을 까고 나와 잡초를 씹어 먹고 벼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돕다가 추수가 끝나면 석회질 껍질만 남으리라. 이것이 우렁이의 사랑법이다. 사랑을 자기 몸으로 아는 생명은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대자연은 존재의 이유 따위를 묻지 않는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는다던 어느 시인처럼! 
 
 

고진하 목사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 문학상과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원주 한살림 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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