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신의 편리함이 낳은 기다림의 실종

중앙선데이 2017.06.11 00:18 535호 31면 지면보기
홍은택 칼럼
 요즘 내 마음의 평정을 무너뜨리는 것은 매시간 카톡으로 받는 매출 집계다. 시간당 매출이 어제와 지난주의 같은 시간대와 비교돼서 집계된다. 매출은 요일별 특성이 강해서 지난주 같은 요일과의 비교가 중요하다. 지난주보다 늘면 사업이 성장, 줄면 퇴보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에 따라 마음은 춤을 춘다.
 

매시간 매출 집계 카톡 확인
등락하는 숫자 보고 마음 졸여
다른 이들에겐 기다림 말하면서
이 글 쓰면서도 스마트폰 들여다보고…

지난주 대비 30% 증가면 우왕 기분 좋고, 10% 증가 정도면 대수롭지 않다. 0%일 때부터 흔들린다. 여기서 상승세가 멈추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다가 마이너스로 내려가면 요동친다. 뭐가 문제지? 지난주보다 제품들이 안 좋나? 제품 설명이 부족한가? 가격대가 높나? 아니면 시장에 이미 풀려 있는 제품인가? 그것도 아니면 서비스 장애라도 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뭐지? 구매력 있는 고객들이 다들 바쁘거나 아픈가? 아니면 이 나라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걸까? 세계 경제도? 나라도 사서 매출을 메울까?
 
만약 매출이 연속 상승하면 ‘역시 사업 모델이 괜찮아. 이렇게 잘나가도 되는 거야. 흐흐흐’하며 마음이 느긋해진다. 매출이 떨어지면 다시 ‘뭐가 문제지’의 프로세스가 재개되고.
 
이런 생각들을 매 시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매출 톡은 회의할 때도, 회식할 때도, 화장실에 있을 때도 사정없이 날라온다. 그냥 두세 시간마다 한 번씩 보면 안 되나 하겠지만 성적표를 빨리 받아 보고픈 것처럼 은근 중독성이 있다. 어떨 때는 ‘아직 한 시간 안 지났네’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잠들기 직전 매출이 떨어지면 꿈자리가 사납다. 때로 악몽을 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깨어나면 손을 더듬더듬 뻗어서 핸드폰을 손에 쥔 뒤 잠금화면을 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퍼렇게 빛나는 화면을 쳐다본다. ‘자는 동안 매출은 어떻게 됐지?’
 
24시간 편의점 주인에 빙의해 보면 이런 모습일 거다. 카운터에 앉아서 한 시간 간격으로 돈을 센다. 현금으로 들어온 것은 손으로 세고, 카드로 들어온 것은 매출전표의 숫자를 더한다. 중간에 세다가 누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다시 세고-. 매출 규모가 좀 되면 다 세는 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세면서 한숨을 푹푹 쉬거나 때로는 배시시 웃는다. 안다. 이걸 읽는 분들께 어떤 형용사가 떠오르는지. 실성한-.
 
만약 내게 어떻게 신경쇠약에 안 걸리고 사느냐고(또는 일은 언제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새롭게 습관들인 명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호흡에 집중하면서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매 시간 명상할 수는 없는 노릇. 같이 일하는 팀장은 “차라리 매출을 보지 말라”고 한다. 매출 보고 명상하고 매출 보고 명상하는 보스는 기괴하다 못해 쌍욕하는 보스보다 더 공포스러울 수 있다.
 
매일 불안하다. 일주일이나 한 달 단위로 보면 매출이 플러스일 때가 더 많은데도 말이다. 일년 전과 비교해 보면 월간 매출은 세 배쯤 성장했다. 그러면 시간당 매출도 꾸준히 오를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데 함정이 있다.
 
나심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마라』에는 주식 투자를 잘하는 치과의사의 얘기가 나온다. 매년 15%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어쩌다 손해볼 때도 있지만 변동성은 연 10%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우울하다. 그의 투자 실적을 1초 단위로 본다면 수익이 발생할 확률이 50.02%밖에 안된다. 손실이 날 확률은 49.98%. 분 단위로 보면 수익이 날 확률은 50.17%, 1시간 단위로 봐도 51.3%밖에 안된다. 그가 매시간 모니터를 쳐다 봤다면 대체로 두 번 중 한 번은 손실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심리학에서는 손실에서 오는 고통이 이득에서 오는 기쁨보다 강도가 크다고 하니 그의 일상을 우울이 지배한다. 그런데 일 단위로 보면 수익이 날 확률은 54%, 그렇게 시간 단위를 늘려가 1년 단위로 보면 수익 확률이 93%에 이른다. 일년에 한 번씩 쳐다 봤으면 그는 늘 유쾌했을 것이다.
 
좀 더 길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을 짧게 끊어 봐서 마음이 흔들리는 게 비단 이것만은 아니다. 카톡도 그렇다. 사람들이 어느 날 전화보다 카톡을 많이 쓰게 된 것은 카톡이 비동기적 통신이어서다. 전화는 쌍방이 동시에 대화할 수 있을 때에만 연결되는 반면 카톡은 언제든 메시지를 보내 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답장할 수 있다. 시공간의 구속에서 자유롭다. 더구나 무료다. 하루에 송수신되는 카톡은 80억 통 남짓. 하루 전화 통화량은 10억 통에 못 미치는 걸로 알고 있다. 하루 아침에 전화는 너무 무거운 통신수단이 됐다. 카톡으로 통화가능 여부를 묻고 전화를 해야 예의있는 사람이다. 언어의 역사에서 5000년 전 말만 하다가 글자를 쓰게 된 것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항상 연결 가능하기 때문에 수시로 카톡을 확인하고 상대방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한다. 답장 속도가 서로에 대한 예의와 성의를 가늠한다.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지워지지 않으면 나를 무시하는 거다. 읽씹(메시지를 읽고도 답장이 없는 상태)은 수상한 침묵이어서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또는 그런 추측들을 할까 봐 다들 잽싸게 회신하려고 길가는 중에도, 밥 먹다가도,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통신의 편리함으로 대화의 총량은 늘어났지만 우리는 기다림을 잃어 버리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새 정부나 야당도 길게 보고 정치를 했으면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구해야 하는 아들에게도 길게 보라고 말한다. 정작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몇 번 롤러코스터를 탔는지 모른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는데 내게 현재는 잘못될 미래 아니면 잘못될까 봐 우려되는 미래다. 수만 년 전 심각한 생명의 위협에 항상 노출돼 있던 사바나 초원에서 미래를 비관적으로 예측하는 유전자가 우성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더 이상 아닌데도 자동화된 부정적인 사고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나를 알아차리고 있어서. ㅎㅎ
 
 

홍은택
카카오메이커스 대표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