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0) 세종과 충성스러운 반대자들] ‘예스맨’보다 ‘충성스런 반대자’ 곁에 둬라

중앙일보 2017.06.11 00:02
세종, 사사건건 반대한 신하들에게 전권 맡겨 … 순응만 하는 참모 총애하는 보스는 자격 미달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

 
리더가 중시하는 업무, 역점사업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참모는 누구일까. 재능과 품성, 추진력, 정치력과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겠지만 그 일에 대한 전문성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일을 잘 알아야 그 일을 잘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을 잘 아는 사람은 다시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리더와 같은 생각을 하고 리더의 지침에 충실하게 부응해주는 사람, 반대로 리더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다.
 
이 중에서 리더가 어떤 사람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대부분 전자다. 능력이 월등하게 차이가 난다면 또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자신의 뜻을 앞장서서 구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은 리더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 결정을 충실히 따른다는 자세만 전제가 된다면, 리더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후자일 수 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참모와 논쟁하면서 리더는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판단을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모의 반대를 통해 정책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단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바로 세종대왕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세종의 반대자였던 황희·허조·신개
 
세종대왕이 자신을 반대한 신하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의견을 항상 경청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장인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박은에게 집현전의 구축작업을 책임지게 했고, ‘임금의 원수’라고 불렸던 황희에게는 19년간이나 영의정을 맡겼다.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들인 맹사성, 허조, 신개, 최윤덕 중에서 고분고분 임금의 말을 들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더욱이 세종대왕에게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정책, 혹은 그 사안을 강하게 반대한 신하에게 바로 그 일을 맡겼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공법(貢法)은 세종대왕이 전 백성을 대상으로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정도로 역점을 두었던 사업이다. 이 공법의 가장 큰 반대자는 황희였는데, 이 제도의 시행을 책임졌던 사람도 황희다. 공법은 이전까지의 조세제도인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 징세관의 재량권을 용인하다 보니 부정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불필요한 비용이 낭비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세종은 이를 해결하고자 일괄정액세인 공법을 도입, 조세의 명확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공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답험손실법은 매년 토지의 작황 정도를 실측하여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조세부담능력에 따른 공평 과세가 이루어지지만, 공법은 소득에 상관없이 세금을 고정해놓기 때문에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에게 불리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공법을 반대하고 답험손실법을 보완·유지하자는 신하들이 많았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황희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공법을 기필코 시행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았지만 “황희의 의논대로 하라”(세종12.8.10)며 최대한 그의 의견을 수용했고 그로 하여금 공법개혁 작업을 총괄하게 했다. 그 결과 양 제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연분 9등, 전분 6등법’이 도출되게 된다.
 
허조(許稠, 1369~1439)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허조는 임금의 결정에 반대하고 소수의견을 내는 것이 일상이었던 인물이다. 실록에 보면 다른 신하들이 모두 찬성할 때조차도 ‘허조만 홀로 아뢰며~(獨許稠曰)’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러한 허조를 무려 6년 간이나 이조판서로 썼다.(품계가 1품으로 승진해도 2품인 이조판서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수령의 임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백성들이 수령을 고발할 경우 수령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인사 검증절차를 어떻게 운영하고 과거시험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등 인사(人事)와 관련된 수많은 사안들에서 임금의 생각에 반대한 신하였지만, 허조만한 인사 전문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다”라고 불평하면서도 그의 반대의견을 반영했던 것이고, 허조 역시 개인적으로는 끝내 찬성할 수 없는 사안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차질 없이 준비되고 시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세종15.10.24).
 
토론 후 결론나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아울러 신개(申槩, 1374~1446)의 사례도 살펴볼 만 하다. 연로한 영의정(황희)과 좌의정(맹사성, 허조)을 대신하여 우의정으로서 일상적인 업무를 도맡았던 신개는 임금이 사초(史草)와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확립한 인물이다. 태조 이성계가 공민왕에서 공양왕까지의 실록과 자신이 즉위한 이후의 모든 사초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자 역사 기록의 객관성을 침해한다며 강력히 반대했던 신개는 1431년 세종이 태종의 실록을 읽어보겠다고 하고, 1438년 또다시 실록을 열람하겠다고 시도할 때마다 임금이 역사 기록에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며 반대해 무산시켰다. 세종으로서는 자신의 지시에 계속 반기를 드는 신개가 못마땅했음직한 데도 신개를 실록을 편찬하고 관리하는 춘추관(春秋館)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세종대왕은 신개에게 [고려사] 찬술의 책임을 맡겼으며 역사적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춘추관에 가서 신개에게 가부를 의논하라”고 지시하곤 했다(세종 21.1.27). 역사기록, 편찬에 있어서는 신개만한 전문가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세종24.3.2).
 
이 밖에도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이 파저강 정벌의 최고지휘관으로 출정했을 때 세종의 지시내용에 이견을 달고 심지어 엎어버리다시피 했지만, 세종은 그를 신임하고 전권을 맡겼다. 실력 면에서나 업적 면에서나 당시에 최윤덕만큼 군사를 잘 알고 있던 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자신의 뜻에 군말 없이 따르고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신하가 아니라, 지엄한 왕명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신하를 중용했다. 그런 신하일수록 정책을 보다 꼼꼼하게 살피고 문제점을 보완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토론의 과정, 기획과 준비의 과정에서는 자유로운 반론을 허용하지만, 최종 결정이 나면 그때까지의 의견 차이는 잊어버리고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힘을 합치는 조직 문화가 정착되어야 가능하다. 그에 대한 리더와 참모들 간에 굳건한 상호신뢰만 조성되어 있다면, ‘충성스러운 예스맨’보다는 ‘충성스러운 반대자’를 참모로 두는 것이 조직의 시야를 넓히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확보하며, 결정의 완결성을 기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비순응’을 ‘건설적 비순응’으로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