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팬이 ‘더 킹’이다

중앙선데이 2017.06.11 00:02 535호 29면 지면보기
지난주 빅뱅 탑의 대마초 흡연에 이은 약물 과다 복용 소식이 큰 충격을 던졌다.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군림해온 톱클래스 중견 아이돌인 만큼 청소년 팬들에게 미칠 파장도 우려된다. 댓글에도 “팬들이 제일 불쌍하다” “팬들 걱정 좀 해라”는 반응이 많았다.
 

아이돌과 팬덤의 역학관계

한편 ‘원조 아이돌’ 문희준의 골수팬들은 최근 지지 철회 선언을 했다. HOT 해체 후 뜬금없는 락커 변신으로 백만 안티를 양성했지만 골수팬들의 결집으로 재기에 성공, 친근한 이미지로 H.O.T. 멤버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다. 그런데 결혼·임신 관련 거짓말이 드러나자 ‘팬에 대한 무성의’ 등을 문제 삼으며 골수팬들이 등을 돌렸다. 흥미로운 건 과거처럼 소극적인 ‘탈덕’ 수준을 넘어 대선 때나 듣는 용어인 ‘지지 철회’ 선언을 하며 적극적으로 해당 연예인의 활동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 한때 패션지 ‘앙앙’이 매년 조사하는 ‘안기고 싶은 남자’ 부동의 1위를 15년 이상 고수했던 기무라 타쿠야가 최근 ‘전성기 지난 톱스타’ 3위에 랭크되는 굴욕을 당했다. 1991년부터 장기 집권해온 ‘국민 아이돌’ 스마프 해체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한순간에 ‘국민 비호감’ 신세가 된 것이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는 레드카펫 매너가 논란이 됐고, 영화 ‘무한의 주인’ 흥행 실패와 각종 CF계약 종료 등 요즘 들어 하는 일마다 죽을 쑤고 있다.
 
지난달 일본 여행을 갔다가 새삼 놀란 일이 있다. 스마프의 후배로 쟈니즈 아이돌의 계보를 잇는 토키오와 V6 멤버가 아침 정보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다. 예능에서 온몸으로 활약하던 전성기 시절이 지금도 생생한데 사십 줄에 들어 차분하게 정보전달을 하고 있는 모습에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낯설다기보다 안심했다고나 할까. 일본 아이돌 업계가 일찍부터 신비주의보다 옆집 오빠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는 전략을 써온 덕인지, 마치 오랜만에 옛 동네 이웃을 만난 듯한 반가움이 있었다. 나도 이런데 일본 팬들에게 저들은 어떤 존재일지 생각하다 아이돌과 팬덤의 공생 관계를 떠올렸다. 아이돌과 팬덤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난해 ‘AI와 한류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들은 SM 이수만 회장의 얘기가 퍽 인상적이었다. AI 기술과 한국의 셀러브리티 산업을 결합한 맞춤형 방송시대가 곧 도래할 거란 전망이었다. 멀리서 빛나는 줄로만 알았던 ‘스타’가 나만을 위해 방송을 해준다는 건데, 그런 가상현실이 과연 기쁨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서비스를 해줬으면 싶은 아이돌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중학생 딸과 함께 ‘프로듀스101’을 보다 무릎을 쳤다. 문제는 ‘애착’이다. 증강현실게임 ‘포켓몬고’ 열풍처럼, 디지털미디어 시대일수록 콘텐트는 아날로그한 ‘애착’의 개념이 키워드가 되고, 아이돌 시장도 팬과의 애착관계가 강화되는 쪽으로 진화 중이다. 시청자가 병아리 연습생을 잘 골라 매일 투표를 하며 정성껏 키우는 시스템이니 애착이 안 생길 수 없다. 딸은 투표를 해야 진정한 ‘국민 프로듀서’라며 “엄마도 행동하라” 요구하고, 데뷔가 간절한 연습생들은 카메라를 향해 “제발 살려달라”고 읍소하는 지경이니, 킹메이커로서 내 ‘한 표’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이제부터라도 한 명을 ‘픽’해 애착을 쌓으면 언젠가 외로울 때 나에게 맞춤 방송을 해주는 AI 아이돌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끈끈한 애착에 배신을 당한다면? 나라도 ‘지지 철회’를 하고 싶을 것 같다. ‘지지 철회’의 수고가 필요없도록 팬과의 애착 관계를 소중히 관리해야 하는 것은 해당 아이돌과 소속사의 몫이다. AI 영역으로까지 진화해갈 아이돌 왕국에선 팬이야말로 ‘더 킹’일 테니까.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