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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시설 끌려갔다 탈출해 불교에 귀의한 혜법스님의 50년만의 가족 찾기

중앙일보 2017.06.09 00:01
 
경상북도 영주시 영산암(靈山菴)의 주지로 있는 혜법(慧法) 스님. 그가 사가(私家)에서 쓰던 이름은 '은주'다. 성(姓)도 정확하지 않다. '곽씨' 또는 '박씨'로 짐작할 뿐이다. 나이도 50대 후반일 것으로 추정된다.

혜법 스님, 1969년 집앞에서 놀다 선감학원으로 끌려가
선감학원, 부랑 청소년 감화 명분으로 소년들 강제 입소

선감학원, 일제때 경기 안산에 세워졌다 1982년 폐쇄
노역은 물론 학대와 고문 등 폭력도 이뤄져

1977년 선감학원 탈출, 떠돌이 생활하다가 20살 때 불교 귀의
가족 찾고 싶어도 잘못된 주소와 이름 때문에 못찾아

어린 시절 이름 '은주', 부모와 형 2명, 누나 1명, 쌍둥이 동생
"수원 성곽이 보이는 곳에 거주, 저수지에서 놀던 기억나"

경북 영주시 평은면 영산암에서 혜법스님이 자신의 기록이 남아 있는 선감학원 원아대장 사본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혜법스님은 8~9세 무렵 영문도 모른 채 청소년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에 끌려갔다가 8년쯤 지나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자신의 정확한 이름과 나이 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모와 가족을 만나길 염원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영주시 평은면 영산암에서 혜법스님이 자신의 기록이 남아 있는 선감학원 원아대장 사본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혜법스님은 8~9세 무렵 영문도 모른 채 청소년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에 끌려갔다가 8년쯤 지나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자신의 정확한 이름과 나이 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모와 가족을 만나길 염원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워낙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진 탓에 제대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선감학원 출신이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2년 경기 안산시에 설립된 소년 수용소다. 부랑 청소년들을 감화시킨다는 명분으로 8~18세 소년들을 강제로 입소시켰다. 노역은 물론 학대와 고문 등 폭력도 이뤄졌다. 1982년 문을 닫을 때까지 입소한 소년 수만 5759명, 이 중 수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혜법 스님은 8살 무렵이던 1969년 선감학원에 입소했다. 납치를 당했다고 했다.
선감학원 원아대장 사본에 있는 혜법 스님의 어린 시절 사진. 프리랜서 공정식 

선감학원 원아대장 사본에 있는 혜법 스님의 어린 시절 사진. 프리랜서 공정식

 
"그날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어요. 쌍둥이였지요. 다들 정신없고 바쁘니깐 집밖에 나와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저쪽에서 차 한 대가 오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은 도망가는데 나는 멀뚱멀뚱 그냥 있었어요. 그랬더니 차 안에서 내린 사람이 손을 잡아끌더라고요. '안 간다. 집에 갈 거다'라고 했더니 방망이로 머리를 세게 때렸어요."
 
이렇게 끌려간 곳(스님은 시청이라고 추정)에서 사람들이 이름과 집 주소를 물었다. 우물쭈물 '은주'라고 대답했지만 더 말을 했다간 맞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소년은 '한용수'라는 잘못된 이름을 가지고 선감학원으로 보내졌다.  
 
학원 생활은 지옥이었다. 매일 맞았고 툭하면 기합도 이어졌다. 
 
그 사이 '은주'는 '용수'에서 '은수'가 됐다. 선감학원에 들어간지 2년 정도 됐을 무렵, 학원에서 신원조사를 새로 했다. 이름을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주먹이 날아왔다. 다급한 소년은 '은주'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를 '은수'로 잘못 들은 교사는 명부에 '은수'라고 적었다. 생일도 대충 만들었다.
 
혜법스님의 기록이 남아있는 선감학원 원아대장 사본. 프리랜서 공정식

혜법스님의 기록이 남아있는 선감학원 원아대장 사본. 프리랜서 공정식

 
초등학교 6년이 됐을 무렵인 1977년 9월, 소년은 다른 원생 5명과 탈출을 시도했다. 썰물로 드러난 갯벌 위를 달려 바다에 뛰어들었다. 파도가 거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살에 휩쓸려 죽거나 붙잡혀서 맞아죽거나 죽는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전에도 탈출을 하다가 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맞았다고 했다.
  
뭍으로 왔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주민 등의 신고로 다시 잡혀갈 수도 있어서다. 동냥을 하며 고향인 수원에 도착했지만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어린 시절 집을 떠난 탓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시청 등을 찾아가서 설명했지만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정확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찾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선감학원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깡통을 차고 노숙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1982년 1월 제 발로 선감학원을 찾아갔다. 성장증명서를 뗀 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호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은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후 양평의 한 농가에서 일을 거들며 생활했다. 배도 타고 김 양식장에서 일도 했다. 신문도 팔았다.
그러면서도 수원을 계속 들락날락했다. 가족을 찾을 수 있지않을까 하는 기대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스무 살 무렵 불교에 발을 들였다. 기도를 하면서 선감학원에서의 아픈 기억을 잊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집과 가족을 찾는 일도 접었다. 
 
그러던 중 2015~2016년 무렵 언론을 통해 선감학원의 실상이 알려졌다. 사망한 원생들을 위한 추모제도 열렸다. 순간 스님도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난해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예전 기억이 나는 겁니다. 누나한테 업혀서 산길을 걷고, 할아버지 장례 치르던 것, 저수지에서 삼촌이란 놀던 기억…. 몸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더라구요. 부모님도 보고싶고, 돌아가셨다면 남은 형제들이라도 찾고 싶었어요."
 
하지만 선감학원에 남아 있는 '원아 대장' 속 '곽은수'의 기록은 달랐다. 납치가 아닌 부모에게 버림받아 2년간 구걸을 하며 부랑아로 떠돌다가 수원시에서 단속에 걸려 1971년 11월 25일에 선감학원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혜법 스님은 "그 기록은 잘못 된 것"이라고 했다.
"집 근처에 성곽 같은 것이 있었어요. 방앗간도 있었지요.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저수지도 있었고 문둥이 마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고 형이 2명, 누나가 1명 있었어요. 내가 8살이 됐는데도 학교를 못갔는데 그걸  누가 물어보니까 아버지가 '호적이 여자로 되어 있다'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나요. 모든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 평생 소원입니다. 우리 가족을 꼭 찾아주세요."
수원시가 혜법스님의 가족을 찾기 위해 제작한 전단지 [사진 수원시]

수원시가 혜법스님의 가족을 찾기 위해 제작한 전단지 [사진 수원시]

 
수원시는 선감학원과 관련된 기록물 전수조사와 함께 홍보전단지, 시청 홍페이지 등을 활용한 혜법스님 가족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스님의 가족과 비슷한 나이의 노인을 집중 탐문, 소셜네트워크(SNS) 등을 활용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수원시 관계자는 "스님의 나이와 성명 등이 모두 불확실해 가족을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며 "혜법스님과 비슷한 나이의 가족을 잃어버렸거나 가족의 소재를 아는 분들은 꼭 수원시청 인권팀(전화 031-228-2624~5)나 인권센터(전화 031-228-2617~8)해달라"고 당부했다.
 
수원=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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