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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혼잣말로 한 영어 욕설, 모욕적인 표현으로 단정 못해"

중앙일보 2017.06.06 12:22
욕설의 의미가 담긴 영어 표현을 썼다면 모욕죄가 성립할까?
 

사이 나쁜 이웃 주민 앞에서 "fucking crazy" 말했다가 모욕죄 기소유예
헌재 "욕설 의미 외에 '어처구니없다'는 뜻도 있어" 기소유예 취소 결정

지난해 5월 이모(61)씨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같은 아파트 주민 A씨(41)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화단에 물을 주는 문제로 갈등을 벌이다 서로 폭행과 무고 혐의로 맞고소를 한 상태였다. A씨는 스무 살 위인 이씨에게 반말로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다 아파트 경비원이 다가오자 갑자기 존댓말로 바꿨다. 이씨는 A씨의 태도가 돌변하자 어이가 없어 “유 아 퍼킹 크레이지(You are fucking crazy)"라고 말했다. A씨는 이씨가 자신에게 욕했다며 고소했고 검찰은 모욕죄를 인정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씨는 “반말로 시비를 걸던 A씨가 아파트 경비원을 보자 돌연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영어로 혼잣말한 것”이라며 검찰 처분에 불복해 헌법소원을 냈다.
 
분수대 - 집단모욕

분수대 - 집단모욕

이씨의 영어 표현이 상대에 대한 욕설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헌재는 이씨의 표현 중 ‘fucking'은 ’대단히‘, ’지독히‘, ’매우‘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봤다. ’crazy'는 ‘미친’, ‘정상이 아닌’, ‘말도 안 되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했다. A씨를 경멸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여지도 있다고 본 것이다. 헌재는 “사전적 의미뿐만 아니라 표현을 하게 된 경위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헌재는 “이씨가 표현한 의미는 ‘당신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당신 정말 말도 안 된다’ 정도의 의미로써 이씨가 고소인을 모욕할 의사가 있었다거나 해당 표현이 고소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경멸적인 표현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이씨의 영어 표현을 들었다는 아파트 경비원의 사실확인서만으로는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듣고 보았다는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기에 부족하므로 이씨의 행위에 공연성(公然性·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이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헌재는 이에 따라 “법리오해로 이뤄진 기소유예 처분으로 인해 이씨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이 침해됐다”며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라고 결정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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