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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를 이끈 총리 傳(10)]'교통의 사나이' 김영일 총리

중앙일보 2017.06.06 07:00
북한 총리 가운데 재임 기간에 서울을 찾은 사람은 지금까지 2명 있다. 연형묵(1931~2005)과 김영일(1944~ )이다. 연형묵은 1990년 9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방문했고 김영일은 2007년 11월 제1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했다.  
 

북한 육해운성에서 28년간 근무
대학 졸업후 항해기사 자격 취득
장관인 육해운상에서 총리로 발탁

2007년 제1차 남북총리회담 참석
화폐개혁 실패의 여파로 총리서 낙마
총리는 '경제사령관' 보다 경제실패 '희생양'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1월 16일 청와대에서 제1차 남북총리회담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김영일 북한 내각총리 일행을 위한 환송 오찬을 마련했다. 노 대통령과 김영일 북한 총리(왼쪽), 한덕수 총리(오른쪽)가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1월 16일 청와대에서 제1차 남북총리회담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김영일 북한 내각총리 일행을 위한 환송 오찬을 마련했다. 노 대통령과 김영일 북한 총리(왼쪽), 한덕수 총리(오른쪽)가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영일은 북한의 제11대 총리다. 박봉주 전임 총리가 2007년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김영일은 한국의 국토교통부에 해당하는 육해운성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나선특별시 나진해운대학(현 나진대학)을 졸업하고 항해기사 자격을 취득한 뒤 79년 육해운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98년 육해운상(장관)이 될 때까지 육해운성에서만 근무한 ‘교통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2007년까지 육해운상을 역임한 뒤 총리로 승진했다. 육해운상을 포함해 육해운성에 근무한 기간만 무려 28년이다. 지금까지 총리들은 당과 내각을 오고 간 사람들인 반면 내각에만 있었던 사람이 총리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힘’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일 총리(오른쪽 네번째)는 2010년 2월 9일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2.8비날론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둘째)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영일 총리(오른쪽 네번째)는 2010년 2월 9일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2.8비날론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둘째)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영일은 ‘충성사업’으로 총리를 시작했다. 그가 총리에 임명된 해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1917~1949) 생일 90주년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김정숙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시에 600세대의 아파트를 지으려고 했다. 김영일은 자신을 총리로 뽑아 준 김정일에게 보답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래서 취임한 지 9개월 만인 2008년 1월 600세대를 완공했다.  
 
이 아파트 건설은 총리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함경북도 당위원회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일이다. 김영일은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로 생각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김영일이 총리로 재임했던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권력교체기였다. 김정일이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지도부에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김영일은 김정일의 신임으로 총리까지 올랐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던 터라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김영일은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만 쉬고 살아야 했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2009년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이 경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후계 체제의 기반에 될 경제 건설에 힘을 쏟았다. 평양에 10만 세대 주택 건설을 지시하고 심각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자강도 희천수력발전소 완성을 서둘렀다. 김정일은 그 지휘봉을 김정은에게 맡겼던 것이다.
 
비밀 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로부터 800만 달러를 가져오고 중국 단둥(丹東)시로부터 대출을 받아 주택 건설을 시작했다. 김정은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속도전을 재현해 ‘150일 전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인력동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건축자재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10만 세대는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결국 돈이 필요했다.
 
북한은 자금조달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화폐개혁이었다. 해방 이후 5번째 시도다. 화폐개혁의 명분은 인플레이션 억제· 재정 확충· 시장활동 억제 등을 통해 계획경제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암시장 거래로 돈을 번 신흥 부자들에게 그 동안 모은 돈을 통해 내게 하려는 ‘꼼수’였다.
 
이에 따라 2009년 11월 30일 구화폐 100원을 신화폐 1원으로 교환하는 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현금 교환은 1세대당 10만원까지로 제한했다. 한도액을 넘는 구화폐를 장롱 속에 감춰 두려고 해도 휴지가 되기 때문에 신흥 부자층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화폐개혁은 당초 의도와 달리 북한 경제를 심각한 혼란으로 빠뜨렸고 그 동안 추진해 온 경제정책에 많은 차질과 피해를 주었다. 북한 원화가치가 추락하고 북한 경제의 달러화·위안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화폐 교환은 12월 6일까지 진행됐다.
 
 
김영일 총리(사진 왼쪽)가 2007년 10월 29일 베트남을 방문해 응우옌민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을 주석부에서 면담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영일 총리(사진 왼쪽)가 2007년 10월 29일 베트남을 방문해 응우옌민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을 주석부에서 면담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화폐 가치의 급변으로 물가는 폭등했다. 쌀값이 30배나 급등해 암시장에서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고 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불도 중단되는 공장이 생겼다. 이 혼란에 대한 책임은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뒤집어 썼다. 북한은 죄명을 화폐개혁 실패가 아니라 간첩죄를 적용했다. 6.25전쟁 시기 틈을 타 북한에 잠입한 간첩이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방해하고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채택하려다 체포됐다는 것이다. 북한이 화폐개혁 실패를 그의 죄명으로 할 경우 정책 실패로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화폐 개혁의 실패는 총리였던 김영일에게도 여파가 미쳤다. 박남기가 2010년 3월 처형된 이후 3개월 만에 김영일도 총리에서 내려왔다. 총리는 말로만 ‘경제사령관’이었지 경제 실패에 책임을 지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김영일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 그의 행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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