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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가야사에 얽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개인적 인연

중앙일보 2017.06.06 00:01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과 뒤쪽 봉화산.봉화산은 노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마애불과 자은골이 있다.송봉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과 뒤쪽 봉화산.봉화산은 노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마애불과 자은골이 있다.송봉근

“(경남 김해)진영은 가락국 영토였다. 김수로왕이 인도출신인 허 황후(허황옥)와 결혼해 아들을 일곱(딸은 셋) 두었는데 둘은 정치로, 다섯은 절로 보냈다. 다섯째 아들이 여기 와서 절을 짓고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빌었는데, 그 절 이름이 자은암(子恩庵)이었다. 그 뒤로 절이 이어져 왔고 골짜기 이름도 ‘자은골’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왕골’이라고 불렸지만, 원래는 자은골이었다.…어린 시절 놀이터는 자은골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봉하마을에서 방문객에게 김해 가야사 자주 언급
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법학도 아닌 역사학도 되고 싶었다"며 역사에 애정
전문가들 "가야사 복원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잇는 역사적 과제"

“나를 가리켜 ‘걸어 다니는 관광상품’이라고들 했다. 사람들이 먼 길을 와서 내 얼굴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김해의 역사와 자연까지 모두 즐기고 가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 뒤 봉화산 자은골에 누워있는 마애불.이곳은 가락국 역사가 서린 자은암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남도유형문화제 제40호다.[사진 김해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 뒤 봉화산 자은골에 누워있는 마애불.이곳은 가락국 역사가 서린 자은암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남도유형문화제 제40호다.[사진 김해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2010년)에 나오는 글귀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 김해 봉하마을에서 방문객들에게 수시로 김해 가야사를 얘기했다고 한다. 허 황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茶)가 김해시의 차 브랜드인 ‘장군 차’가 됐다는 얘기도 포함했다. 노 전 대통령이 그만큼 가야사에 관심이 많았던 셈이다. 
 
의전비서관 등으로 노 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5년을 함께 한 오상호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은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도 편할 때 역사 얘기를 많이 했고, 봉하마을에서 농사 짓고 책을 쓰면서 주변 가야 유적지를 찾아가 휴식을 취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도 역사에 제대로 편입되지 않았고, 일본이 가야사를 왜곡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는 걸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왜(大和倭) 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건너와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설치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한국 역사학자에 의해 입증됐다. 
김해시 대청리 불모산에 있는 장유사 전경. 가락국 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허황옥의 오라비 장유화상이 최초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오른쪽 60m 아래에는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다는 토굴과 장유화상의 영정 등이 있다.[사진 김해시]

김해시 대청리 불모산에 있는 장유사 전경. 가락국 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허황옥의 오라비 장유화상이 최초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오른쪽 60m 아래에는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다는 토굴과 장유화상의 영정 등이 있다.[사진 김해시]

 
노 전 대통령의 가야 역사에 대한 이런 깊은 관심을 문재인 대통령이 그대로 이어받았을까. 문 대통령은 지난 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영·호남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국정과제로 꼭 포함해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약간 뜬금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문 대통령의 언급처럼 이 얘기는 많은 반향과 함께 가야사를 잘 모르는 이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가락국 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허황옥의 오라비 장유화상의 영정.[사진 김해시]

가락국 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허황옥의 오라비 장유화상의 영정.[사진 김해시]

김해에는 수로왕 뿐 아니라 허 황후, 그리고 허 황후와 함께 인도에서 서기 48년에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그의 오라비 장유화상, 불교와 차(茶)의 전래 등에 관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탑상편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다 풍랑에 되돌아오니 인도의 부왕(父王)이 파사석탑을 실어 보내 무사히 가락국(김해)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무사히 건넌 것을 감사하기 위해 지었다는 해은사, 장유화상이 지었다는 신어산 은하사, 장유화상 부도가 남아있는 불모산 장유사. 가락국 2대 거등왕이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부은암·모은암, 수로왕의 다섯째 아들이 지었다는 봉화산 자은암 등이 그것이다. 
 
이를 근거로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가 국내에 전래됐다는 기존 학설을 300여년 이상 앞당길 수 있다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
 
인도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에 되돌아오니 부왕(父王)이 파사석탑을 실어보내 무사히 가락국(김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는 김해시 구산동파사석탑.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허황옥에서 시작된 김해 허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한다. 경남도문화제 227호다. [사진 김해시]

인도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에 되돌아오니 부왕(父王)이 파사석탑을 실어보내 무사히 가락국(김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는 김해시 구산동파사석탑.수로왕과 결혼한 인도 허황옥에서 시작된 김해 허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한다. 경남도문화제 227호다. [사진 김해시]

이뿐만이 아니다. 가야의 역사는 경남 거창·산청·함양·의령·창녕·하동·함안·합천·고성, 경북의 고령·성주·달성 등 영남권 뿐만 아니라 전북 남원·장수,전남 광양·순천·구례 등에 뻗쳐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들 17개 시·군은 이미 오래전 ‘가야 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 협의회‘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1998년 3월에는 옛 6가야(김해·함안·고성·고령·성주·상주)의 자치단체가 ‘가야문화권 행정협의회’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두 협의회는 ‘가야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 등 가야사 복원과 관광사업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실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오히려 김대중(DJ) 대통령 시절 활발했다. 교육부 산하에 ‘가야사 복원 정책위원회’를 두고 학술회의를 열거나 관련 서적을 발간했다. DJ를 비롯해 DJ 정부 출범 직후의 총리 김종필, 비서실장 김중권 모두 수로왕의 후손 김해 김씨였던게 배경이 됐다는 후문이다. 이 덕분에 김해 가야사 1단계 복원사업이 진행돼 DJ정부 때인 2000~2004년 1290억원원을 들여 김해 대성동 고분군 등 문화재 발굴·복원 등이 진행됐다.
 
가락국 역사가 서린 김해 불모산 장유사에 있는 장유화상 사리탑. 경남문화재자료 제31호다. [사진 김해시]

가락국 역사가 서린 김해 불모산 장유사에 있는 장유화상 사리탑. 경남문화재자료 제31호다. [사진 김해시]

그러나 2단계 사업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부터 예산부족으로 착공조차 못한 채 표류했다. 
 
이영식(61) 인제대(역사고고학과·박물관장) 교수는 “가야사를 잘 알고, DJ 정부 시절 어떤 사업을 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던 노 전 대통령이 호남 정서 등을 의식에 드러내 놓고 가야사 복원·연구사업을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고 배경을 짐작했다.
 
문 대통령의 측근들은 DJ정부와 노 전 대통령의 역사인식 등을 잘 아는 상태에서 문 대통령이 가야사를 국정 과제화 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에 대한 문 대통령의 관심은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2011년)에도 나온다. “나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과목이 가장 재미 있었고, 성적도 제일 좋았다. 지금도 나는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한다. 처음 변호사할 때 ‘나중에 돈 버는 일에서 해방되면 아마추어 역사학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대학입시 때에도 역사학과를 가고자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했다. 내 성적이 법·상대에 갈 수 있는 등수라는 게 이유였다.“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발언에는 김해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김경수(김해을)·민홍철(김해갑) 의원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두 의원은 지난 총선 때 가야사 복원을 김해 지역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공약은 이영식 인제대 교수의 조언 등을 받아들인 것이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김경수 의원은 “문 대통령이 원래 역사를 좋아하는데다 노 전 대통령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번 가야사 복원 지시를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 의원은 대선기간 가야사에 얽힌 비화도 소개했다. 김 의원 등은 지난 5월 9일 치러진 대선 기간 때 가야사 복원을 지역공약을 넘어 영호남 화합을 위한 공통공약으로 채택하려고 했다. 대선기간 섬진강에서 공통공약 발표회를 갖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김 의원은 “당시 여의치 못한 사정이 있어 섬진강에서 가야사 복원을 영호남 공통공약으로 발표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의 가야사 인식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유 석좌교수는 노 전 대통령 재임기간인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문화재청장을 지내 문 대통령과도 가깝다고 한다. 유 석좌교수는 수년 전 김해에서 “일본에 가서 가야사를 공부해야 할 정도로 국내에선 가야사 연구가 제대로 안 돼 있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고 한다. 김경수 의원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을 문 대통령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 봉하마을에서 방문객들에게 김해의 가야사 이야기를 하곤했다. 사진은 8주기 추도식이 열린 지난달 23일 마을 모습. 송봉근 기자<br>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 봉하마을에서 방문객들에게 김해의 가야사 이야기를 하곤했다. 사진은 8주기 추도식이 열린 지난달 23일 마을 모습. 송봉근 기자

물론 김해지역 등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지시가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김경수·민홍철 의원은 물론 허성곤 김해시장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라는 배경을 두고 하는 얘기다. 허 시장은 허황옥이 허씨 성을 두 아들에게 물려 준 김해 허씨 출신이다. 이 같은 역사성에서 수로왕의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는 “30여년 동안 연구해온 학자지만 그동안 차별·홀대받는 가야사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문 대통령이 국정과제화 지시를 해 감개무량하고 힘이 솟는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인연을 상기하면 이번 가야사 연구와 복원의 국정 과제화 지시는 필연에 가깝다”고 말했다. 
 
김해=황선윤 기자 suyo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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