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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외면하지 말아주세요”…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중앙일보 2017.06.05 15:51
박나원양의 어머니 김미향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편지. 오른쪽은 목에 구멍을 내 호흡하고 가래를 뽑아내야 하는 나원양의 서울대병원 입원 모습.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박나원양의 어머니 김미향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편지. 오른쪽은 목에 구멍을 내 호흡하고 가래를 뽑아내야 하는 나원양의 서울대병원 입원 모습.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저희는 피가 마르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는 가습기메이트로 인해 고통받는데 아무도 얘기조차 바로 해주는 분이 안 계시고 답답한 마음에 대통령님께 이렇게나마 하소연 올립니다.'
 
2011년 10월 생인 쌍둥이 박나원·다원양의 어머니 김미향(34)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김씨는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제 권고 사실을 모른 채 2012년 초 애경산업의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할인가로 구매했다. 이후 쌍둥이 자매는 모두 호흡곤란을 겪었고 특히 언니인 나원양은 목에 구멍을 내 산소호흡기를 사용해야 했다. 돌을 갓 넘겼을 때였다. 쌍둥이 모두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도 판정에서 '관련성 확실' 1단계가 나왔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와 판매사는 아직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나원양은 지금도 목으로 숨을 쉬고 가래를 뽑아내는 기기 '케뉼라'를 사용하고 있다.
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5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환경의 날'이다. 이날 청와대 분수대 앞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나란히 서서 문 대통령에게 보낼 편지 다섯 통을 차분히 낭독했다. 편지 낭독 후에는 문 대통령 가면을 쓴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피해자들을 안아주고 절을 하는 '위로' 퍼포먼스도 벌였다. 당초 이들은 이곳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경찰에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불허하자 '문화행사' 형식으로 편지만 낭독했다.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생후 120일만에 사망한 동영이.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생후 120일만에 사망한 동영이.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2005년 태아 '밤톨이'를 잃고 2006년 말 4개월 된 아들 동영이까지 보내야 했던 권민정(40)씨는 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중한 아가에게 유해물질을 몰아주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기적인 엄마의 외침을 신조차도 외면하고 싶은가 봅니다. 살균제를 사서 넣고 가동시키고 아이를 연달아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했다는 저의 무지함의 죄를 가해기업과 그런 악의 제품을 승인시켜준 정부에게 조금만 나누어 달라는 기도는 저의 욕심인가 봅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화학물질 규제에 엄격한 시스템과 피해자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던 '서로 책임 소재 떠넘기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명확한 기준과 체계가 갖춰지길 바랍니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김미란씨가 국회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지난해 10월 김미란씨가 국회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2015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편지를 쓴 딸 김미란씨는 "문 대통령께서는 '국민의 생명과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가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3·4단계 유족과 피해자들고 '그래, 이게 나라다'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고 썼다. 김씨의 아버지 김명천씨는 2015년 천식·폐렴·호흡곤란 등의 증세를 호소하다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김씨는 2007년부터 약 5년 간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김씨는 2013년 질병관리본부에 피해 신고를 했지만 건강 악화로 조사를 받지 못했다. 지난해 1월에야 유족이 정부 조사에 응할 수 있었는데 같은 해 8월 4단계 판정이 나왔다. 
 
딸 김씨는 "3·4단계는 증상이 경미한 것으로 알려져 여전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3·4단계 폐섬유화도 1·2단계 폐섬유화와 같다. 단지 급성이 아닌 만성이란 이유로 똑같이 폐섬유화로 죽고 병들고 폐 이식까지 해야 하는 3·4단계 피해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의 편지가 청와대에 전달된 5일 오후 문 대통령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지원확대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31일까지 정부에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고자는 모두 5615명이다. 이중 1195명(21.3%)이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사망자 8명을 포함해 49명이 추가로 피해신고를 했다. 피해자들은 "문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국가책임 인정, 재조사를 통한 진상규명, 재발 방지 등을 약속한만큼 이를 빨리 이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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