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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9위 니시코리 라켓 집어던지게 한 정현

중앙일보 2017.06.05 01:00 종합 26면 지면보기
전날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승부는 어떻게 됐을까.
 

프랑스 오픈 ‘1박2일 32강’ 한일전
정현, 두 세트 내준 뒤 매섭게 추격
승기 잡았지만 갑작스런 비로 중단
휴식시간 얻은 니시코리 유리해져
2-3 졌지만 한국 테니스 희망 보여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21·한체대·세계 67위)과 일본 테니스의 영웅 니시코리 게이(28·세계 9위)의 사상 첫 맞대결. 정현은 1박2일간의 혈투 끝에 아쉽게 무릎을 꿇었다.
 
정현은 4일 프랑스 파리의 롤랑 가로스 스타디움에서 속개된 프랑스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3회전(32강)에서 니시코리에게 세트 스코어 2-3(5-7, 4-6, 7-6, 6-0, 4-6)으로 졌다. 전날 열린 경기 4세트 도중 비가 내리면서 두 선수의 대결은 이틀에 걸쳐 열렸다.
 
이로써 정현은 2015년 메이저 대회 본선에 진출한 이후 2년 만에 메이저 개인 최고 성적(32강)을 거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정현은 3회전에 진출하며 랭킹 포인트 90점과 상금 11만 8000유로(약 1억5000만원)를 받는다.
 
이 경기는 한·일 테니스 에이스의 맞대결로 화제가 됐다. 메이저 대회에서 한·일전이 열린 건 테니스 사상 처음이었다. 정현은 1·2세트를 모두 내줬지만, 3·4세트를 따내면서 경기를 풀세트로 몰고 갔다.
 
니시코리는 다양한 기술을 자랑하는 기교파 선수다. 정현과의 경기에서 그의 서브 평균 속도는 시속 164㎞에 그쳤지만, 슬라이스 서브(공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서브)와 플랫 서브(스핀을 걸지 않고 치는 서브) 등 현란한 서브로 경기를 주도했다. 허를 찔린 정현은 서비스 리턴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1·2세트를 내줬다.
 
2017 프랑스오픈 정현-니시코리 게이 32강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2017 프랑스오픈 정현-니시코리 게이 32강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그러나 경기가 시작된지 2시간 30분이 지나면서 변화가 생겼다. 정현은 니시코리의 전술을 간파한 뒤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3세트에는 서브게임을 한 차례도 브레이크 당하지 않고 6-6을 만들었다. 타이브레이크에 돌입해서는 ‘클레이 코트의 황제’ 라파엘 나달(31·스페인·4위)이 인정한 백핸드 스트로크로 니시코리를 압도한 끝에 3세트를 따냈다.
 
상승세를 탄 정현은 4세트에서도 3게임을 연속해서 따냈다. 니시코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수를 연발한 끝에 그는 신경질을 내며 라켓을 코트에 집어던지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졌다. 롤랑 가로스 스타디움은 지붕이 없는 개방형 코트다. 점토로 만들어진 클레이코트가 젖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됐다.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정현에겐 야속한 비였다. 반면 오른 어깨와 손목 부상이 있는데다 체력마저 떨어졌던 니시코리에겐 반가운 단비였다. 이어 열린 4일 경기에서 정현은 4세트를 6-0으로 따냈지만, 마지막 5세트를 4-6으로 내줬다.
2017 프랑스오픈 정현-니시코리 게이 32강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2017 프랑스오픈 정현-니시코리 게이 32강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정현은 “프랑스오픈에서 메이저 대회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해서 기쁘다. 비로 연기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제 계속 경기를 했다면 내게 더 유리했을 것 같다”고 했다. 니시코리도 “무척 힘든 경기였는데 우천 순연이 된 건 행운이었다. 5세트에서도 다소 밀려서 괴로웠지만 이겼으니 다행”이라고 전했다.
 
손승리 코치는 “지난해까지 정현은 숲보다는 나무를 봤다. 오직 기술에만 신경을 썼는데 올해는 경기를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며 “특히 니시코리와 경기를 하면서는 몇 시간 만에 자신의 전술을 만들어 접전을 펼쳤다”고 평가했다.
 
니시코리는 세계 4위까지 올랐던 세계적인 선수다. 14세 때 미국으로 테니스 유학을 떠났던 그는 “키가 작은 아시아 선수는 테니스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이겨냈다. 현재 세계 10위 이내 선수 가운데 키가 1m80㎝가 안 되는 선수는 니시코리(1m78㎝)가 유일하다. 2014년 프랑스오픈에서 1989년 우승한 중국계 미국인 마이클 창을 코치로 선임해 부족한 파워를 다양한 기술로 보완했다.
2017 프랑스오픈 정현-니시코리 게이 32강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2017 프랑스오픈 정현-니시코리 게이 32강전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니시코리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난주 미국의 ESPN이 선정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선수 순위에서 니시코리는 아시아 선수 중 최고인 20위에 올랐다. 니시코리의 지난해 수입은 34억엔(약 345억원). 재규어(자동차), JAL(항공), 태그호이어(시계), 유니클로(의류) 등 14개의 업체가 니시코리를 후원한다.
 
그에 비하면 정현은 자라나는 ‘새싹’이다. 한국 선수로는 이형택(41·은퇴) 이후 10년 만에 메이저 대회 3회전에 올랐다. 뛰어난 체격(1m87㎝·85㎏)까지 갖춘 정현이 기술을 보강하면 니시코리를 능가하는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유로스포츠와 뉴욕타임스는 이번 대회에서 정현을 세계 테니스를 이끌 차세대 스타 중 하나로 꼽았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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