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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재력가 노인 납치…모텔·정신병원에 가두고 50억 땅 가로챈 일당

중앙일보 2017.06.04 13:06
정신질환이 있는 한모(67)씨는 20년 넘게 서울 양재동의 한 주차장 내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해왔다. 합리적인 판단도, 의사표현 능력도 부족한 한씨에겐 교류하는 가족이나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한때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 회사가 부도났고 한씨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희망은 '땅'이었다. 서울 양재동과 성내동에 약 170평 정도 되는 한씨의 땅은 그의 '지나간 영광'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만큼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도 한씨는 토지에 대한 집착이 상당했다. 한씨의 사정을 알고 있던 이웃 주민 박모(57)씨는 그의 사연을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부동산 투자회사를 운영하던 정모(45)씨에게도 전해졌다. 사기 전과가 있던 정씨는 귀가 솔깃해져 박씨 등을 설득해 그의 토지를 가로챌 계획을 세웠다.
정씨 일당의 범행 방식.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정씨 일당의 범행 방식.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먼저 정씨 일당은 지난 2015년 1월 한씨와 공범 김모(61)씨를 서류상 '혼인 관계'로 만들었다. '서류상'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 한씨를 가둔 것이다. 김씨는 작전에 성공하면 정씨로부터 '빌라 한 채'를 받기로 약속했다. 이후 이들은 한씨의 컨테이너 박스로 찾아가 자신들을 '안기부 직원'이라고 속여 한씨를 납치·폭행했다. 그렇게 한씨로부터 토지 매매에 필요한 서류를 강제로 작성하게 했고 그 서류로 50억원 상당의 땅을 모두 팔아 돈을 챙겼다.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정씨 등은 한씨를 또 다시 납치해 충북 청주와 서울 일대를 옮겨 다니며 외부 잠금장치가 설치된 모텔에 7개월 간 감금했다. 서류상 '배우자'였던 김씨의 지위를 이용해 한씨를 1년 6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의사의 진단이 있고, 법적 보호자가 원하면 강제입원이 가능한 제도의 허점을 이용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시가 50억원 상당의 토지를 소유한 독거 노인이 토지를 팔아치우고 행방불명됐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장기간 가족이 없던 한씨가 김씨와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토지를 판 점, 한씨가 유난히 토지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점 등 의심스러운 정황을 토대로 수사에 나섰다. 그렇게 정씨 일당을 붙잡은 경찰은 지난 4~5월 정씨와 박씨 등 4명을 특수강도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납치·폭행에 가담한 공범 박모(59)씨 등 4명은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한씨는 현재 피의자들이 강제 입원시킨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전창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생활범죄팀장은 "한씨는 자신의 토지가 매도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적 기반을 잃은 피해자의 치료 및 생계비 지원 방은 등을 강구하고 향후 민사상 후견 제도, 피해회복 등을 위한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관계기관과 지속적으로 협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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