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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회일수록 포퓰리즘이 먹혀들 가능성 커

중앙선데이 2017.06.04 01:56 534호 22면 지면보기
[세상을 바꾼 전략] 국민을 중독의 늪에 빠뜨린 페론의 포퓰리즘
1 1946년 6월 4일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신임 대통령(왼편)이 에델미로 파렐 전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어깨띠와 지휘봉을 건네받는 모습. [위키피디아]

1 1946년 6월 4일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신임 대통령(왼편)이 에델미로 파렐 전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어깨띠와 지휘봉을 건네받는 모습. [위키피디아]

6월 4일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지도자가 군부 쿠데타의 일원으로 정계에 등장했고 또 몇 년 지나 대통령에 취임한 날이다. 쿠데타로 정권에 몸담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잃기도 하면서 대통령 임기 중에 사망할 때까지 근 30년 동안 아르헨티나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후안 도밍고 페론의 이야기다.
 

최저임금 법제화, 노조설립 지원
노동자·여성 지지로 1946년 집권
‘산업화 성공적 수행’ 주장 있지만
아르헨 경제 망가트렸다는 평가

중위소득이 평균소득보다 낮으면
포퓰리즘 통할 가능성 커져
文 정부 '더불어 성장' 비전
공공 마중물로 생산성 높여야

1943년 6월 4일 쿠데타 직후 현역 대령 페론은 국방부에 근무하면서 노동사회보장처를 거의 창설하다시피 해서 6개월 후 노동사회보장처 장관직을 맡았다. 당시 노동사회보장처는 마이너 정부 부처로 간주되었지만, 페론이 주도한 첫 아르헨티나 사회보장제도는 그를 대중적 인기의 정치지도자로 우뚝 세워 주었다. 페론은 최대근로시간, 재해보상, 유급휴가, 최저임금, 상여금, 퇴직금 등을 법제화하고 해고조건 강화, 노조설립 지원, 노사분규 조정, 집세 동결 등 여러 노동·사회복지 정책을 실시했다. 1944년 1월 산후안 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페론은 국민 동원 능력을 마음껏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1944년 2월부터 국방부 장관직을, 7월부터는 부통령 역할도 겸직했다.
 
 
에비타가 석방 요구 민중시위 이끌어
2 1945년 10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부 청사 앞에서 후안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는 데스카미사도(셔츠가 없는 빈곤층을 일컫는데 시위 참가자 대부분 셔츠를 입고 있음)의 시위 모습. 이날은 아르헨티나 ‘로열티 데이’의 기원이다. [위키피디아]

2 1945년 10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부 청사 앞에서 후안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는 데스카미사도(셔츠가 없는 빈곤층을 일컫는데 시위 참가자 대부분 셔츠를 입고 있음)의 시위 모습. 이날은 아르헨티나 ‘로열티 데이’의 기원이다. [위키피디아]

1945년 9월 페론은 “아르헨티나 국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개혁을 이뤘다”고 연설했다. 다음 달인 10월 군부 내 페론의 경쟁 집단은 페론을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4일 후 구속했다. 그러자 에비타(에바 두아르테) 등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민중 시위를 전개했다. 10월 17일 석방된 페론은 밤 11시 10분 정부 청사 발코니에서 30만 청중을 상대로 아르헨티나를 ‘강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만들겠다고 연설했다. 이날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로열티 데이’로 기념되고 있다.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페론은 석방 5일 후 에비타와 결혼했다. 에비타의 합류 후 페론의 주 지지층은 노동자·여성으로 더욱 뚜렷해졌으며, 다음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더욱 조직화됐다.
 
1946년 2월 대선에서 페론은 투표자 과반의 지지를 얻어 6월 4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1년 11월 아르헨티나 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이 부여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페론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이듬해 6월 4일 페론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지만, 7월 에비타의 사망 이후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어 1955년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직을 잃고 17년 동안 스페인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3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부부의 1948년 공식 초상화. 부인을 대동한 유일한 아르헨티나 대통령 공식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누마 아이린하크 작. [위키피디아]

3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부부의 1948년 공식 초상화. 부인을 대동한 유일한 아르헨티나 대통령 공식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누마 아이린하크 작. [위키피디아]

1973년 3월 페론의 출마가 봉쇄된 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이 지명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5월에 취임했다가 페론을 위해 7월 사임했다. 9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페론은 출마하여 당선됐고 10월에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으나 9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병사했다. 부통령이자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했으나, 1976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잃었다.
 
페론은 국민 인기를 얻는 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특히 두 번째 부인 에비타의 도움이 컸다. 에비타는 사생아로 태어나 여러 고난을 겪었던 이른바 흙수저 출신으로 파격적이고 소탈한 언행으로 데스카미사도(셔츠가 없는 빈곤층)로 불리는 저소득층으로부터 짙은 공감을 얻었다. 에비타를 시성(성인으로 추앙)해달라는 아르헨티나인들의 편지 약 4만 통이 그의 사후에 바티칸으로 쇄도하기도 했다.
 
후안 페론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양극화되어 있다. 페론이 한때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를 동경했고 나치 전범의 아르헨티나 거주를 허용했다는 사실에서 페론의 정치를 파시즘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또 페론이 마오쩌둥을 직접 언급했고 체 게바라나 살바도르 아옌데 등과 교류했다는 사실에서 사회주의로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페론과 에비타를 추종하는 페론주의자들 가운데에는 극우도 있고 극좌도 있다. 좌와 우를 일직선 대신 편자(horseshoe)나 원 모양의 곡선 위에서 분류하는 관점에서는 페론주의를 파시즘·공산주의 모두와 유사하게 분류한다.
 
페론 집권 시절의 아르헨티나는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중산층도 두터워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페론 정권은 아르헨티나 국가 경제를 망가트렸고 국민을 포퓰리즘에 중독되게 하여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포퓰리즘, 기득권·엘리트·다원주의 공격
포퓰리즘은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중의 단기적 인기에 영합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 아닌 단체의 술로 회원들에게 생색을 내는 계주생면(契酒生面), 또는 아침 3개 저녁 4개 주는 것 대신 아침 4개 저녁 3개 주는 것으로 눈속임을 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로 여겨지고 있다.
 
포퓰리즘이 공격하는 대상은 주로 기득권, 엘리트, 다원주의 등이다. 국민의 인기를 얻으려는 노력 자체는 민주주의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포퓰리즘이 나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대체로 포퓰리즘은 국가 지속 발전에 필요한 기득권에도 반대하고 또 생산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국가 상태를 악화시키는 나쁜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특정 계층의 자원·노동에서 오는 가치를 빼앗아 다른 특정 계층에게 이전하는 행위는 결코 민주적이지 못하다.
 
물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공동체의 임무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배려해야 하는지는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또 처지에 따라 다를 뿐이다. 불평등이 옳고 그름을 떠나 포퓰리즘은 불평등에 기생한다고 볼 수 있다. 불평등할수록 평등으로 끌고 가려는 정치적 힘이 존재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어떤 불평등 상황에서 포퓰리즘이 잘 받아들여질까? 부자와 빈자의 구성비가 9:1로 나뉘는 상황 그리고 1:9로 나뉘는 상황을 비교해 보자. 90%의 부자가 십시일반으로 10%의 빈자를 도와주는 방안은 부자에게 부담이 작으면서 빈자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비해 10%의 부자가 90%의 빈자를 돌보기는 부자에게 큰 부담이 되어도 빈자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부자 1, 빈자 9의 상황보다 부자 9, 빈자 1의 상황일 때 재분배가 더 잘 이루어질 것 같지만, 선거와 같은 현실적 정치과정에서는 정반대다. 재분배는 9:1 상황보다 오히려 다수가 재분배를 원하는 1:9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 사회에서 세금 징수와 재정 분배의 구조는 복잡하다. 누진세제로 징수되는데다가 또 분배되지 않고 정부가 쓰는 몫이 크며 또 재분배가 특정 집단에게 집중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설명을 위해 단순하게 부자에게 세금을 더 징수해서 정부가 쓰지 않고 빈자 중심으로 재분배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평균 소득 이하의 계층은 포퓰리즘의 잠재적 수혜자이고 따라서 잠재적 지지자다. 한국노동연구원 추계에 따르면 2015년 상위 10% 한국인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48.5%를 차지하고 있다. 이 추계와 위 가정에 기초해 본다면, 한국에서 포퓰리즘의 잠재적 지지자가 거의 90%에 이른다고 해석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평균 소득 이하의 사회 구성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잘 받아들여진다. 국민을 소득 순으로 배열했을 때 딱 중간에 있는 소득자를 중위 소득자로 부른다. 중위 소득자는 소득 기준으로 국민을 절반씩 나누는 경계선이다. 만약 중위 소득이 평균 소득보다 크다면, 평균 소득 이하의 국민이 절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포퓰리즘의 잠재적 지지자는 소수이고 따라서 포퓰리즘이 파급적이지 않다. 예컨대 앞서의 9:1 상황처럼 극소수의 극빈자가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평균보다 약간 더 큰 소득만을 갖는다면, 포퓰리즘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반대로 만약 중위 소득이 평균 소득보다 작다면, 평균 이하 소득을 가진 잠재적 포퓰리즘 지지자는 전체의 과반이 되고 따라서 포퓰리즘이 통할 가능성은 커진다. 대개 중위 소득은 평균 소득보다 작다. 중위 소득이 평균 소득보다 더 작으면 작을수록 포퓰리즘의 잠재적 지지자는 증가된다. 즉 포퓰리즘이 잘 통할 국가나 시대는 중위 소득이 평균 소득보다 얼마나 더 작으냐에 따라 판별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 확산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불평등하지 않으면 되는데, 동서고금을 다 살펴봐도 완전 평등이 이뤄진 예는 없다. 대신에 불평등하더라도 계층 간 이동이 용이하면 포퓰리즘 여지가 줄어든다. 정치문화도 포퓰리즘 확산 여부에 중요하다. 포퓰리즘의 부정적 장기 효과에 대해 인식과 교육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있으면 포퓰리즘이 자리를 잡기 어렵다.
 
 
계층 간 이동 용이하면 포퓰리즘 여지 줄어
정부로서 듣고 싶지 않은 평가 가운데 하나는 포퓰리즘일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대통령 선거 공약의 실현성과 국정 효율성을 심도 있게 따져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우는 4대 비전 가운데 두 가지는 ‘더불어 성장’과 ‘지속 가능 사회’다. 이런 비전은 그냥 재분배하는 방식보다 진정한 공공 마중물로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는 성공한 대통령이 없다는 자조적 인식이 팽배하다. 계주생면이나 조삼모사도 ‘계 탔다고 좋아하다 집까지 팔게 되는’ 계원 그리고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을 구분 못하는’ 원숭이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현명한 국민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시대의 훌륭한 국가지도자는 훌륭한 국민이 만든다는 진리를 되새겨야 한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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