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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공은 ‘나야 나’

중앙선데이 2017.06.04 00:02 534호 30면 지면보기
‘명성황후’ ‘영웅’ ‘윤동주 달을 쏘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뮤지컬은 여럿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이자 현재에 대한 직접적인 전사(前史)로서 돌아볼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를 소재로 한 서울시뮤지컬단의 신작 ‘밀사-숨겨진 뜻’도 그런 역사뮤지컬이다. 그런데 부제인 ‘숨겨진 뜻’에 주목하면 결이 다르다. 요즘 대학로에서 가장 핫하다는 오세혁 작가는 특유의 동시대적 감각으로 신선한 텍스트를 발굴해 냈다. 역사 교과서 한 페이지 속에서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인물들을 깨워낸 것이다.
 

창작뮤지컬 ‘밀사-숨겨진 뜻’
기간: 6월 11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문의: 02-399-1114

이준·이상설·이위종. 학창 시절 세트로 외웠던 이 헤이그 특사 3인은 이름의 무게부터 명성황후나 안중근과는 다르다. 그간 다양한 매체에서 ‘원소스 멀티유즈’로 맹활약해 온 ‘영웅적 인간’들에 비하면 한참 조연급이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엘리트 공무원들이지만 결국 본회의 참석조차 허가받지 못하고 뜻이 좌절돼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세혁은 별 드라마 없는 세 명의 공무원 중에서도 당시 20세로 가장 어렸던 이위종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왜일까. 연초 ‘영웅’ 앙코르 공연의 이례적 흥행을 두고 “영웅을 기다리는 시대”라는 진단도 나왔지만 일시적인 복고 코드였을 뿐,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21세기에 거대한 영웅 서사는 진작부터 빛이 바랬다. 드라마 ‘김과장’ 열풍으로 새삼 확인했듯이 지금은 ‘내 안의 작은 영웅을 발견하는 시대’인 것이다. 약소국에 태어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던 청년 이위종을 전면에 내세운 ‘밀사’는 영웅적 인물을 주인공 삼았던 전통적 역사 뮤지컬의 스핀오프 버전과도 같다.  
 
주인공의 인지도 탓인지 630석 규모의 중극장에서 차분히 공연됐지만, 텍스트나 음악적 스케일 면을 볼 때 대극장용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대중음악 작곡가 송시현이 구슬픈 해금 선율을 시작으로 클래식과 발라드, 록 장르를 아우르며 작곡한 음악은 눈물로 호소할 수 밖에 없었던 무력하고 억울한 시대적 상황에 잘 어울렸다. 을미사변을 목격한 유년시절의 트라우마,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만난 러시아 여인과의 사랑 등은 대극장 뮤지컬 문법을 그대로 따른 형식이다.  
 
하지만 그 안에 깨알처럼 심어놓은 의미들이 퍽 새롭고 진보적이다. 뮤지컬이지만 단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연극 못지않은 텍스트 분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이위종은 사실 왕족의 일원이었다. 어려서부터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에서 생활하며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소위 ‘금수저’다. “나는 조선인이 아니다. 정확한 보수에 따른 정확한 역할을 수행하겠다”며 요즘 청년들처럼 당당함과 무례함을 오가던 그가 만국평화회의 이후에는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과 항일 전투를 하다 전사한다. 러시아 귀족 여인과 결혼해 화려하게 살면 그만일텐데 굳이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 없이 살아가는 오늘의 ‘금수저’들에게로 향한다.  
 
세대간 갈등도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우리를 만든 모든 것이 조선이니까. 우리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왕이니까”라는 아버지뻘 이준·이상설과 “나를 만든 건 조선이 아니고, 나를 대표하는 사람도 조선 왕이 아니”라는 위종의 대립은 요즘 아버지-아들 세대 국가관의 차이 그대로다. 하지만 “그 수치스런 순간에 무얼 했냐”는 아들의 물음에 “우리 세대가 무능했다”는 아버지의 인정, 그리고 화해가 있어 미래지향적이다.
 
‘영웅’ 안중근과의 만남도 신선한 각도로 그려진다. 독립군 지도부의 분열로 하나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상황은 안보 사면초가 상황에서 밥그릇 싸움에만 몰두하는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그것과 판박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가 ‘지도층 분열’ 탓임을 지적하며 “모두를 하나로 모을 좋은 지도자를 만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적들의 지도자부터 제거하겠다”는 안중근의 대사처럼 11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좋은 지도자’를 찾고 있다.
 
“미안해서요, 조선이 왕족 때문에 망했으니까.” “미안해서요, 조선이 양반 때문에 망했으니까”. 왕족 이위종과 양반 안중근, 두 금수저의 부채의식은 극 초반 위종과 엘리자베타의 대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은 작고 약하고 무력한 동시에 자존심도 없죠. 조선 왕조 500년 역사는 사대주의의 역사였어요” “조선 왕과 귀족들의 역사만 그렇지 않을까요? 백성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러시아 역사도 똑같거든요. 그래서 러시아 국민들은 황제를 단두대에 세우려 준비 중이에요.”
 
뮤지컬 ‘밀사’의 숨겨진 영웅은 아무래도 우리 국민들인 듯하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서울시뮤지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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