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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사(使) 빼고 노·정만?

중앙일보 2017.06.01 02:32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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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은 지금 좌불안석일 것이다. 작심했든 안 했든 그의 발언이 큰 파장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5일 문재인 정부의 1호 공약을 언급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가 넘쳐나게 되면 산업 현장의 갈등이 더욱 심화할 것”이란 발언이 문제가 됐다. 마무리는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요소들은 경총이 적극 나서서 해소할 것”으로 맺었다. 크게 보면 새 정부의 방침과 그리 어긋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게 괘씸죄에 걸렸다. 새 정부의 ‘재벌 개혁’ 의지는 물론 ‘재벌 책임론’까지 부인한 ‘반항’으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노사정 함께 머리 맞대야
일자리 문제 풀 수 있어

당장 다음날 문 대통령은 “경총도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당사자 중 한 축”이라며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경총은 즉각 입을 닫았다. 기업들은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권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재벌들이) 압박으로 느낄 땐 느껴야 한다”고 했다. 여당도 나섰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비정규직을 나쁜 일자리로 만든 주체가 할 말이 있느냐”고 질책했다. 여권의 압박은 30일까지 닷새째 이어졌다.
 
나는 이 장면이 J노믹스(문재인 경제철학)의 성패를 가늠하는 첫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는 재계를 너무 거칠게 다뤘다 역풍을 맞았다. 기업이 투자와 일자리를 줄이면 “이런 식으로 정부에 반항하느냐”며 분노했다. 청와대와 국정자문위, 민주당까지 여권이 그토록 격하게 반응한 데는 혹 이런 노무현 트라우마가 깔려 있는 건 아닌가.
 
재계는 본능적으로 새 권력 앞에 납작 엎드린다. 우리뿐 아니다. 그 자유롭다는 미국도 그렇다.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감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파괴하고 있다”며 ‘반(反) 트럼프’를 외쳤던 IT(정보기술) 3인방, 팀 쿡(애플)·일론 머스크(테슬라)·제프 베조스(아마존)는 트럼프가 당선되자 일제히 백기 투항했다. 베조스는 정규직 일자리를 1년 반 안에 10만 개(기존 18만 개) 더 늘리겠다고 했다. 트위터에 “나의 마음을 그대에게 드린다”는 낯 간지러운 축하 메시지까지 남겼다. 팀 쿡은 애플의 미국 공장 건립을, 머스크는 캘리포니아 공장 증설을 약속했다.
 
하물며 규제 권력이 서슬 퍼런 한국에서야 더 말해 뭣하랴. 몇 차례나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무섭다”고 했다. “법보다 무서운 게 권력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회의원 숫자도 적은데 장관 입각도 많이 했다. 그러니 국회를 통한 법 개정보다 행정명령을 통해 군기를 잡아갈 것이다. 검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의 재량권으로 압박할 것이다. ‘한 놈만 패면 알아서 길 것’이란 분위기다. 지금은 무조건 복지부동할 때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청와대의 일자리 상황판을 걱정했다. “상황판의 숫자는 보통 빨라야 한 달에 한 번, 늦으면 분기에 한 번 갱신되는 지표다. 그런데 그걸 날마다 대통령이 들여다본다고 생각해 보라. 볼 때마다 ‘숫자가 왜 안 바뀌지?’ 생각할 것 아닌가. 그때 누구한테 책임을 묻겠는가. 겁난다. ”
 
재계에선 사(使)는 적폐 청산 대상이요, 노·정으로만 정책이 굴러갈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벌써 조짐도 있다. 국정자문위는 한국노총 간부 두 사람을 29일 영입했다. 정부 관리들이 노조에 노동 정책을 보고하게 된 셈이다. 사측 인사 영입은 물론 없다. 노사 협상 현장도 달라지고 있다. 인천공항 노사는 지난달 26일 첫 만남을 가졌다. 문 대통령 앞에서 약속한 비정규직 1만 명의 정규직 전환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정일용 사장이 “노조의 많은 도움을 기대한다”고 말하자 박대성 민주노총 지부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고 받았다고 한다.
 
J노믹스는 ‘적극적 케인지언’을 추종한다고 한다. 그 케인스가 경제의 출발점으로 꼽은 게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벌 개혁과 기업 군기 잡기는 구분하라는 얘기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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