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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판결 '95억 보험금' 교통사고 살인 미스터리...대법 "계획적으로 보기엔 너무 이례적"

중앙일보 2017.05.31 02:01
2014년 8월 23일 새벽 3시 41분. 충남 천안 부근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면 도로를 달리던 승합차가 갓길에 서있던 화물차를 들이받았다. 승합차는 조수석 부분이 완전히 부셔졌다.
조수석에는 임신 7개월의 캄보디아 여성 A씨(당시 24세)가 타고 있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A씨와 태아의 숨은 멎어 있었다.

고속도로서 정차된 화물차 추돌사고로 아내만 숨져
'아내 명의 수십개 보험금 95억' 고의사고 의심 제기
1심은 무죄, 2심은 '무기징역' '우연의 고의성' 두고 공방
대법원, "계획 범행으로 보기엔 너무 즉흥적" 파기 환송

 
3년전 한 가족의 행복을 앗아간 끔찍한 교통사고였다. 운전자는 A씨의 남편 이모(47)씨였다. 이씨는 안전벨트를 한 덕분에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생활용품점을 운영하는 이씨는 이날 A씨를 데리고 남대문시장에서 물건을 떼오던 길이었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졸음운전을 하다 화물차를 미처 보지 못하고 들이받았다고 진술했다. 도로교통공단의 조사 결과 이씨의 승합차는 시속 60㎞ 정도의 속도로 화물차를 들이받았고, 충돌 당시 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은 없었다. 전형적인 졸음운전 사고의 형태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되는 듯했다.
 
도로교통공단이 분석한 추돌 당시 도면

도로교통공단이 분석한 추돌 당시 도면

 
보험사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런데 보험사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이 사고를 ‘살인사건’으로 바꿨다. 제보자는 “이씨의 보험 사기가 의심된다”고 했다. 이씨가 사고 전까지 아내 A씨 앞으로 든 보험은 26개였다. 사망 보험금을 모두 합하면 95억원에 달했다.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 뒤 보험사기로 보이는 정황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씨는 A씨와 2008년에 결혼한 뒤부터 지속적으로 아내 명의로 보험을 가입했다. 매월 납부한 보험료만 490만원이나 됐다. 자영업자인 이씨의 월 수입(1000만원)을 감안할 때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직후 휴대전화로 찍은 이씨의 사진. 검찰은 이 사진을 이씨의 범행을 의심케 하는 정황 증거로 봤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직후 휴대전화로 찍은 이씨의 사진. 검찰은 이 사진을 이씨의 범행을 의심케 하는 정황 증거로 봤다.

사망한 부인 A씨의 혈액에서는 수면유도제 성분도 검출됐다. 경찰은 이씨가 A씨에게 수면제를 섞은 음료수를 마시게 한 뒤 사고를 일으켰다고 의심했다. 
 
사고가 나기 전 이씨 차량의 주행 상황도 의심스러웠다. 일정 구간에 상향등을 켜고 운전했고, 졸음운전을 했다는데 사고 직전까지 8곳의 곡선 구간을 별 문제 없이 통과한 점 등이다. 충돌 직전에 핸들을 좌우로 조작한 흔적도 있었다.
 
검찰은 이씨가 상향등을 켜서 화물차의 위치를 확인한 뒤 핸들을 조작해 정확히 조수석만 화물차에 부딪히도록 의도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검찰은 이씨를 살인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보험사에 최초로 제보한 사람에게도 공로가 인정됐다. 그는 보험협회로부터 역대 최고 금액인 1억9000여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재판에서는 검찰이 제시한 정황 증거들이 이씨의 고의 사고를 입증할 수 있는지를 두고 공방이 벌어졌다. 이씨는 검찰이 제시한 정황증거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보험을 지나치게 많이 가입한 것에 대해 이씨는 “내가 운영하는 생활용품점의 주요 고객인 보험설계사들의 가입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씨가 몇몇 보험설계사의 요구를 수차례 거절하다 마지못해 들어준 적이 있고, 가입 요구를 잘 거절하지 못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우연한 사고"vs"계획한 범행"…진실공방 속 엇갈린 판결
 
이씨의 혈액에서도 A씨와 동일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됐다. 이씨가 A씨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는 검찰의 주장과 배치되는 증거였다. 이씨가 수면제를 처방받았거나 구입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수면제 구입과 섭취 경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 2심 법원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 재판부는 이씨의 범행을 의심하면서도 이를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무죄 판결을 했다. 이씨의 경제 상황이 거액의 보험금을 타야 할 만큼 어려운 상황도 아니었고, 그가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방법으로 범행을 계획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합리적인 의심을 벗어났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추정한 사고 당시 도로 상황 그래픽.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추정한 사고 당시 도로 상황 그래픽.

 
대신 재판부는 무죄 판결문에 다른 의심스러운 정황을 지적했다.
A씨가 사고 전에 이미 숨져 있었을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119 구조대원과 병원 관계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삼았다. 현장에 출동했던 한 소방관은 “피해자의 다리가 이미 사후강직이 시작된 것처럼 단단하게 굽어 있었다”고 했다. 사고가 난 지 불과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사후강직이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충격을 받은 신체 부위에 멍이 들지 않았고, 사망 후에도 일정시간 유지되는 산소포화도가 0%로 측정된 점 등도 의심스러운 정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A씨의 시신은 부검을 거치지 않고 화장돼 이런 의심은 수수께끼로 남게 됐고, 이후 재판에 영향을 주진 못했다.
 
대법원 "계획 범행으로 보기엔 너무 이례적"

2심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정황증거를 대부분 인정했다. 재판부는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심심치 않게 발생해 특이성이 적고, 연습이든 실제이든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범행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졸음운전으로 가장해 사고를 낸 것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이례적이라고 볼 건 아니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씨의 보험사기 살인은 다시 반전을 맞았다. 그의 범행으로 굳어지는 듯했던 사건을 대법원이 다시 파기했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30일 이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대전고법에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이씨가 교통사고로 위장해 아내 A씨를 살해하기로 계획했다고 해도 우연히 마주친 상황에 즉시 범행을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대형 화물차가 서 있는 상황을 만나면 곧바로 추돌사고를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범행 기회를 기다린다는 것은 계획적인 범행 수법으로는 너무 이례적”이란 것이다.
 
이씨가 화물차를 발견하고 사고를 내기까지 채 1분이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사고를 위한 동선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했어야 하는데, 작심한 범행방법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우연의 요소가 많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조수석쪽 탑승자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하는 게 가능한지, 이씨가 중한 상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의심을 피하려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무모한 성품을 가졌는지 등을 좀 더 심리한 뒤에 유무죄를 판단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의 무죄 취지 판결로 보험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제보자에게 최대 포상금까지 지급된 상황에서 보험사기가 아니라는 취지의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제보자에게 지급된 포상금은 판결 결과와 상관없이 환수 대상이 아니라는게 보험업계의 설명이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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