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년간 집 수리 않고 보상 기다렸는데” 원전 건설 백지화 방침에 주민들 허탈

중앙일보 2017.05.31 01:16 종합 14면 지면보기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백지화 반대 범군민대책위원회’가 29일 울주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전 건설 중단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상경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범군민대책위원회]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백지화 반대 범군민대책위원회’가 29일 울주군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전건설 중단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상경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범군민대책위원회]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이재원(39)씨는 최근 5000만원을 들여 시설 리모델링을 마쳤다. 그런데 인근 원자력발전소 신고리 5, 6호기 건설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백지화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씨는 “신고리 5, 6호기 부지 터파기 공사가 마무리돼 조만간 건설 인부들이 서생면으로 대거 들어올 예정이었다”며 “장사가 잘될 것 같아 식당을 늘렸는데 투자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며 허탈해 했다. 이씨 식당 주변에는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인 식당이 4~5군데 더 있다.
 

‘탈원전 선언’ 직격탄 맞은 울진·영덕
정권 바뀌자 진행 중인 공사 제동
“반대 접고 협조했는데 혹독한 대가
새 정부 철회 안 하면 상경 투쟁할 것”
전문가 “에너지 전환은 시간 걸려
충분한 논의 거쳐 수급계획 짜야”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업무보고를 받은 지난 29일에도 신고리 5, 6호기 공사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5호기는 터파기 공사를 마치고 철근 설비 작업에 돌입했고, 6호기는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다. 총사업비 8조6254억원 가운데 1조5000억원이 이미 투입됐다. 공정률은 28% 수준이다.
 
주민의 70%인 2800여 가구가 가입한 서생면 주민협의회는 지난 29일 원전 건설 백지화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탈원전 정책을 철회하지 않으면 상경투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한마디 상의 없이 원전 정책을 뒤바꾸는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앞서 서생면 주민들은 신고리 1, 2, 3, 4호기 원전이 들어설 때마다 격렬히 반대해 왔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에 따라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은 2012년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신고리 5, 6호기 건설 허가를 신청했고 이듬해 확정됐다. 이상대 서생면 주민협의회 회장은 “주민들이 지난 10년간 원전 건설을 격렬히 반대해 봤자 소용없구나 싶어 5, 6호기가 들어설 때는 정책에 협조하기로 했다. 자율 유치로 지원금 1500억원을 받아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려고 했는데 이마저도 무산될 판이다. 순진한 서생면 주민들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고 억울해 했다.
 
실제로 당장 에너지융합산단 조성 계획부터 발목이 잡힐 상황이다. 울주군 관계자는 “5, 6호기 원전 지원금 1500억원 가운데 800억원을 산단에 투입하려 했는데 지원금이 없으면 사업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문 정부의 ‘탈(脫) 원전’ 정책으로 경북 영덕에 지을 예정인 천지원전의 건설도 무산될지 모른다는 말이 돌면서 영덕읍 석리마을 주민들도 혼란스러워 한다. 천지원전은 2008년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수립 때부터 추진됐고, 2015년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건설사업이 확정됐다. 2027년까지 신규 원전 2기를 지을 예정이다.
 
지난 29일 석리마을회관에서 만난 구춘옥(70·여)씨는 “지금 동네가 엉망진창이다. 수년 동안 수리도 하지 않고 보상만 기다리고 있었다. 원전을 짓지 않더라도 피해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춘희(74·여)씨는 “19살 때 시집을 와 50여 년을 살았는데 원전을 짓겠다고 나가라고 할 때는 아쉬움도 컸지만 어렵게 마음을 정리하고 떠나려고 하니 이제는 다시 없었던 일로 하자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말했다.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전력수급계획은 정부 정책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한수원이 왈가왈부할 상황이 아니다. 공정률이 28%인 신고리 5, 6호기도 백지화하라고 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국내 전력 공급의 39.3%는 석탄이, 30.7%는 원전이 담당하고 있다. LNG 발전은 18.8%,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4.7%다. 문 대통령은 원전과 석탄화력 비중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까지 늘린다는 공약을 내놨다. 발전 단가는 원전(㎾h당 68원)과 석탄화력(73.8원)에 비해 LNG(101.2원)·신재생에너지(156.5원)가 높다.
 
이에 대해 노동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973년 오일쇼크 파동 이후 탈석유 정책으로 전환되기까지 15년이 걸린 것처럼 에너지원 비중을 바꾸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며 “잘못된 에너지 정책은 고스란히 정부와 국민의 피해로 돌아오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전력 수급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울주·영덕·세종=이은지·김정석·이승호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