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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 동행취재] “서류 접수할 데가 없다” vs “서류 접수도 안 한다”

중앙일보 2017.05.30 17:38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1순위 과제는 일자리 창출이다. 일자리가 늘어야 가계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내수 소비가 활성화해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다.
이런 일자리 창출 정책의 핵심은 중소기업이다. 한국 중소기업은 전체 근로자(1489만 명)의 87.7%(1306만 명)를 고용하고 있다. 경제 공약의 양대 축으로 대기업 개혁과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29일 서울 코엑스(COEX)에서 열린 ‘제6회 현대기아차그룹 주최 협력사 채용박람회’는 중소기업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특정 계열 전공자 편애 탓 알짜 기업 지원 제한
고연봉·고복지 일부 기업에만 구직자 몰려들어
취준생 구직 기준은 ‘평균 연봉 3200만원 이상’
채용 담당자 “지방은 뽑아도 안 온다” 하소연

  
본지는 박람회를 찾은 취업준비생 4명과 총 6시간 동안 동행했다. 취업준비생들은 점심 식사도 거르면서 박람회에서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박람회가 끝나고 인근 피자 가게에 들러 지원 의향을 묻자 일제히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들이 ‘지원 포기’를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복합적이다. 일단 기업이 뽑고자 하는 인력의 전공과, 구직자 전공이 확연히 달랐다. 
박람회 입구 우측 ‘채용정보 게시대’를 꼼꼼히 뒤지던 취업준비생 A씨는 “지원할 데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특정 전공자(기계공학)만 채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기가 많은 학과 전공자는 몸값이 높아 박람회에 나온 현대차 협력사보다 조건이 좋은 기업에 지원하려고 했다. 
비(非)공과대학 구직자는 게시대만 보고 귀가하기도 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표현은 구직자들이 모두 공감했다. 
지방 소재 국립대 공과대학 졸업예정 A씨는 “4시간 동안 채용공고를 뒤졌지만, 지원 가능한 기업은 4곳뿐이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중소기업이 청년 3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면 이 중 1명의 임금을 3년 동안 지원하겠다(추가고용지원제도)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기업이 원하는 요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드문 상황에서 이런 정책은 무용지물이다. 일단 인력 수급 미스매치부터 해소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울산 소재 기업의 한 채용 담당자는 “분기마다 어렵게 신입사원을 선발했지만 모두 지방에서 근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입사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이 회사 부스에는 이날 오후 4시까지 단 6명의 지원자만 방문했다.
 
박람회에 참가한 241개 기업 중엔 ‘알짜’로 이름난 곳이 많다. 탄탄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 788만 대를 판매한 세계 5위 자동차그룹(현대차·기아차)이라는 든든한 납품처를 확보한 1차 협력사들이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한 석·박사급 학생은 드물었다. 취업준비생들이 중소기업을 꺼리는 이상 신산업 분야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예산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대통령 공약도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문 대통령은 또 법정근로시간(연장근로·휴일 포함)을 주 52시간으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수익성을 맞추면서 법정근로시간을 지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구직자 눈높이를 맞추려면 연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데, 회사가 수익을 내려면 불가피하게 근로시간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현대·기아차 협력사 대상’을 수상했다는 중소기업이 연봉 1800만원을 제시하자 취업준비생의 반응은 냉담했다. 취업준비생 D씨는 “꼰대 기업”이라고 했고, E씨는 “당신 아들을 이 회사에 보내겠냐고 묻고 싶다”고 뒷담화했다. 
동행했던 취업준비생들은 “초봉 3200만원 이상이면 굽히고 들어간다(원서를 접수하겠다)”고 했다. 
본지가 박람회에 참가한 협력사 중 100개 기업을 임의로 골라 조사한 결과, 3200만원을 초과한 연봉을 제시한 기업은 24곳이었다. 32개 기업은 1800만~3200만원이었고, 나머지는 명확히 연봉을 공개하지 않았다.
박봉에 대해 한 중소기업 담당자는 “기본 연봉은 적지만 이익이 나면 잉여금·성과금 형태로 매년 수백 퍼센트의 보너스를 받는다”며 “현대·기아차 실적에 직접 영향받는 협력사 입장에선 인건비를 고정으로 크게 지급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했다.  
 
채용 시장이 얼어붙는 데는 중소기업의 과도한 눈높이도 한몫한다. 한 중소기업 채용 담당자는 “영어는 읽기·쓰기·말하기·듣기 다 원어민 수준으로 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프랑스어·영어에 능통한 기계공학 전공자를 찾는 기업도 있었다. 아예 경력이 있는 신입사원을 뽑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른바 ‘열정페이(적은 월급을 주면서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태)’ 기업의 전형이다. 이날 박람회에서 드러난 구직자와 중소기업의 엇갈린 눈높이를 고려하면, ‘청년 15만 명을 중소기업으로 보내겠다’는 공약은 당분간 지켜지기 어려워 보였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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