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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시각각] 문, ‘물재인’ 비아냥 두려워 말라

중앙일보 2017.05.29 03:19 종합 34면 지면보기
강찬호논설위원

강찬호논설위원

요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목욕탕에서도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자리를 주겠다는 전화가 올까 봐서다. 가히 당·청 간 밀월 시대다. 하지만 당이 청와대 좋다고 끌려다니기만 하면 둘 다 망하는 게 만고의 진리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그렇게 하다 궤멸했다. 박근혜의 청와대는 검찰과 국정원을 앞세워 비박계에 재갈을 물렸고, 정무수석은 ‘대통령 뜻’이란 한마디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수족 부리듯 했다. 오죽하면 정권 말 원내대표를 맡은 정진석이 당시 정무수석 현기환의 전횡을 참다 못해 박근혜 면전에서 “현기환 자르라”고 절규했을까.
 

민주당, 청와대 거수기 안 돼
대통령도 ‘물’처럼 유연해야

그런데 민주당도 집권 초반부터 청와대 눈치를 보는 조짐이 역력하다. 이낙연·강경화·김상조가 트리오로 위장전입 의혹에 휘말렸고, 이낙연은 그 사실을 시인까지 했는데도 민주당은 3인을 감싸기에만 급급하다. 위장전입은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공약한 5대 고위직 인선 배제 사유의 하나가 아닌가. 아무리 임기 초라도 정부의 명백한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집권당의 역할이다. 적어도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촉구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태를 푸는 게 맞다.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본인이 ‘당정 일체’를 주장했다. 당정 일체는 집권당이 청와대 거수기란 뜻이 아니다. 당이 청와대에 여론을 직보해 인사나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일체’여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당의 자율성을 키워주겠다면서 ‘당정 분리’를 추진했다. 취지야 좋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당은 정책에서 소외돼 힘을 잃고, 청와대는 관료들에게 장악돼 민심으로부터 멀어진 끝에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문 대통령도 그런 기억 탓에 ‘당정 일체’를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의 힘을 뺏는 당정 일체가 아니라 힘을 최대한 실어주는 당정 일체가 돼야 한다.
 
집권 보름 만에 터진 인사 논란에서 보듯 120석 집권당의 앞길은 험난하다. 여소야대 5당 체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국민의당을 흡수해 160석 공룡정당으로 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당장 동교동 원로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당적은 국민의당 사람들인데 행동은 민주당원이다. 총리 후보 청문회에서 이낙연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은 국민의당 의원들에게 “아따, 호남 사람인데 좀 봐주랑께”라고 전화한 사람들이 이들이다. “친문패권주의는 없어졌응께 민주당으로 돌아가자”란 주장까지 대놓고 한다. “민주당 사주를 받지 않고서야 무슨 배짱으로 이런 해당 행위를 할 수 있나”는 의심이 국민의당 입장에선 들지 않을 수 없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수법으론 정계개편은커녕 야당의 분노를 부추겨 여야 갈등만 심화될 뿐이다. 흡수공작 시나리오의 해악은 이뿐 아니다. 바른정당 흡수를 노리는 자유한국당에 힘을 실어줘 보수개혁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당 의원들은 “당 덩치부터 커져야 개혁도 되는 것 아니냐”며 바른정당 흡수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만일 국민의당이 민주당에, 바른정당이 한국당에 먹히면 지난 수십 년간 국민의 등골을 휘게 한 적대적 대결정치만 재연될 뿐이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집권 민정당은 의석(125석) 점유율이 41.8%에 그친 데다 정치 9단 3김이 이끄는 평민(70)·민주(59)·공화(35)에 포위되는 재앙을 맞았다. 하지만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원내총무 김윤환에게 전권을 주며 야당의 요구를 전폭 수용한 결과 국회 사상 최고의 법안가결률과 탄탄한 개혁 실적을 끌어냈다. 노태우가 ‘물태우’란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5공 청산·지방자치 등 야당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의석 점유율과 대선 득표율이 민정당 판박이인 민주당(40%)과 문 대통령(41.1%)에게 요청되는 것도 이런 협치의 정신이다. 문 대통령도 ‘물재인’이란 비아냥을 두려워 말고 야권과 진심으로 소통하라. 역대 최고의 치적을 낸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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