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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다 이젠 사람을 만나러

중앙일보 2017.05.25 00:01
김시영 작가는 조선시대에 명맥이 끊긴 흑자를 재현한다. 강원도 홍천 작업실을 개방해 흑자의 아름다움을 알릴 참이다.

김시영 작가는 조선시대에 명맥이 끊긴 흑자를 재현한다. 강원도 홍천 작업실을 개방해 흑자의 아름다움을 알릴 참이다.

“흑자(黑磁)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검은색에 매료됐죠.”
5월 18일 강원도 홍천 작업실에서 만난 김시영(59) 작가가 거무스름한 도자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김 작가는 "고려흑자를 계승하는 도예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 아니던가. 고려흑자는 생경했다.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조선시대에 워낙 흰색을 귀하게 여겼던 탓에 자취를 감췄지만 고려 때만 해도 많이들 썼다”고 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는 왜 명맥도 이어지지 않은 고려 흑자에 매달린 걸까. 

고려흑자 재연한 김시영 작가 작업실 체험
관광공사, 종갓집 종부 등 지역명사 내세워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상품도 출시 예정

“대학 때인 1979년 산악부 활동으로 태백산맥을 종주하다가 검정색 자기 파편을 발견했어요. 분명 옛 도자기인데 새카만 색이었죠. 이건 뭐지 싶으면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거예요. ”
대를 이어 도공의 삶을 사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김 작가는 이 작은 흑자 파편만 아니었다면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연대세 금속공학과 77학번으로 학부 졸업 후 전공을 살려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까만 도자기’에 뺏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어 89년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곧장 경기도 가평에 가마터 ‘가평요’를 차렸다. 
김시영 도예가의 작업실 겸 자택인 가평요 입구.

김시영 도예가의 작업실 겸 자택인 가평요 입구.

일본이나 중국에는 전통 흑자 기술이 전수되고 있는 반면 당시 국내에는 스승으로 삼을 만한 도공이 없었다. 독학 끝에 흑자를 빚는 데 성공했고, 지금까지 국내에선 유일무이한 흑자 도공으로 활동해왔다. 김 작가 작품은 흑자를 청자나 백자보다 더 고급으로 치는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 일본미술구락부가 낸 ‘미술가명감’ 2009년판은 그가 만든 작은 찻잔 하나를 무려 100만엔(약 1000만원)으로 감정했다. 현재 그가 빚는 달항아리 연작은 개당 3000만원을 호가한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이자 일본 최고의 도자 명가인 심수관 가문의 15대 심수관(57)은 “김시영의 흑자에서 한국 도자의 미래를 봤다”고까지 평했다.
김시영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 오묘한 빛깔의 흑자를 감상할 수 있다.

김시영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 오묘한 빛깔의 흑자를 감상할 수 있다.

작가는 5년 전인 2012년 홍천강 지류 동막천이 지나는 홍천 모곡리에 새 작업실을 지었다. 가평요라는 이름은 유지했다. 대지 3300㎡(약 100평)의 널찍한 땅에 흙과 나무로 만든 건물 세 개 동이 들어섰다. 갤러리와 작업동, 그리고 살림집이다. 이따금 지인들만 찾아왔지만 올해부터는 아예 작업실 문을 개방하고 일반 여행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가 2015년부터 ‘지역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을 콘셉트로 한 여행 상품 개발을 추진했는데, 김 작가가 그 일환으로 2016년 홍천을 대표하는 ‘지역 명사’로 선정됐다. 예술가의 작업실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 아닌가. 여행 상품이 출시되기 전에 냉큼 가평요로 향했다. 
가평요 야외에도 흑자가 전시돼 있다.

가평요 야외에도 흑자가 전시돼 있다.

약속된 만남이더라도 온 가족이 사는 살림집에 불쑥 찾아가는 게 멋쩍었는데, 김 작가와 아내 그리고 자인(31)·경인(27) 두 딸의 환대에 긴장이 누그러졌다. 
김 작가는 먼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갤러리로 안내했다. 작가의 작품 200여 점을 모아둔 곳으로 국내 최대의 흑자 전시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저마다 모양도 무늬도 다른 흑자가 고고한 먹빛을 뿜었다. 김 작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옆에 서서 "청자에 바르는 유약은 철분 비중이 3% 미만이지만 흑자 유약은 7%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흑자를 굽는 가마 온도는 1300도까지 올라간다"는 등 흑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냈다.
갤러리에서 빠져나와 작업동으로 향하니 김 작가의 두 딸이 다완(茶碗·차를 마실 때 쓰는 잔) 체험 자리를 마련해놨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물레질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에 쓸 약토를 구하러 산천을 헤집고 다녔다는 두 딸은 모두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현재는 김 작가의 든든한 후계자다.
말차 거품을 내고 있는 김시영 작가의 큰딸 자인씨. 흑자를 계승하는 도제이기도 하다.

말차 거품을 내고 있는 김시영 작가의 큰딸 자인씨. 흑자를 계승하는 도제이기도 하다.

말차 체험에 등장하는 다완은 모두 김시영 작가 작품이다.

말차 체험에 등장하는 다완은 모두 김시영 작가 작품이다.

큰딸 자인씨가 녹차 잎을 곱게 갈아 만든 말차를 흑자 잔에 소담히 담아 건넸다. 흑자에 연둣빛 말차가 반사돼 다기를 감상하기 좋다. 굳이 일본에서 더 대중적인 말차를 내는 까닭이다. 
차를 마시며 경인씨가 설명을 이어갔다. “가마 온도를 조절하면 자기에 갖가지 무늬가 새겨집니다. 이 과정을 ‘화염을 칠한다’고 표현하죠.”
작가가 기꺼이 문을 열어준 작업실에서의 하루는 충만했다. 고요한 시골 정취를 즐기고, 마당 곳곳에 전시된 흑자의 오묘한 빛깔이나 생김새를 관찰했다. 사람이 테마가 되는 여행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행방식이 될 만한 가능성을 봤다. 여행 상품은 아직 출시 전이지만 김시영 작가의 작업실엔 지금도 찾아가서 여러 체험을 할 수 있다. 단 지금은 10인 이상 단체 예약만 받는다. 작가가 직접 작품 해설을 하고 다도 체험도 한다. 방문일은 작가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 1인 10만원. 강원 홍천군 서면 길곡길 29. 033-434-2544. 
 
홍천 글·사진=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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