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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거지는 망중립성 논란

중앙일보 2017.05.23 16:33
“열차·버스 등 운송 회사는 승객의 신장·몸무게를 이유로 차별적인 요금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1930년대 미국 연방 정부는 운수업체를 상대로 이런 원칙을 내놨다. ‘유니버설 캐리어'라고 불리는 이 원칙은 이후 육상·해상·항공산업은 물론 전화·인터넷 같은 통신망 산업 규제의 핵심 원리로 자리 잡았다. 

미국서 공화당 주도 폐지 움직임
국내서도 페이스북이 논란 촉발
"이통사 영세, 투자 주체 달라져야" 주장
"기업에 망 이용료 받으면 이중부과" 맞서

 
특히 통신업계에서는 '통신망을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다'는 소위 '망 중립성'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이동통신사업자들이 수조원을 들여 통신망을 구축하더라도 콘텐트나 플랫폼 사업자 등 누구나 통신망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원칙 덕에 유튜브·트위터·네이버·카카오처럼 통신망을 활용해 돈을 버는 사업자들이 등장하고 성장했고, ICT(정보통신기술) 생태계는 풍성해졌다.
 
70년간 지켜져 온 이 '망 중립성 원칙'이 국내·외에서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꼭 통신사만 통신망 구축 비용을 부담해야 하느냐'로 모인다.  
망 중립성 논의에 관해 암묵적으로 글로벌 표준 역할을 해온 미국에서 먼저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지난 18일 전체회의를 열고 '오픈 인터넷 규칙'을 폐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폐기 안이 통과되면 유튜브 등 망 사용자들에게 비용 부담을 포함한 의무 조항이 많아진다. 이통사가 서비스 종류에 따라 인터넷 속도에 차등을 두는 것도 가능해진다.
버라이즌 등 미국의 통신사들이 “이통사는 수백억 달러를 들여 통신망을 깔고 관리하는데, 정작 과실은 돈 한 푼 안 낸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이 독식한다”는 주장을 당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 미국에서 저녁 골든 타임(오후 8시~10시) 인터넷 트래픽의 60%는 넷플릭스·훌루 등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이 차지하고, 인터넷 광고 대부분은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 6대 인터넷 사업자가 독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망중립성 원칙이 흔들리는 배경에는 미국의 정치·경제 논리도 작동한다. 애플·구글·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노골적으로 친 민주당 성향을 보여왔다. 상대적으로 전통 산업과 더 친밀한 공화당과 트럼프는 선거 과정부터 실리콘 밸리 기업들에 각을 세웠다. 아마존에는 독점 금지를 위반했다고 공격했고, 애플에겐 아이폰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라고 압박했다. 선거에서 승리한 후에는 망 중립성 폐지에 본격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는 페이스북 때문에 논란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페이스북이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에 전용망을 확충해달라고 요구하면서다. 이통사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국내 한 이통사 관계자는 "페이스북은 국내 통신망에 단돈 1원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데이터 폭증을 일으키고 거액을 벌어가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영세하고, 콘텐트 사업에 관한한 약자인 이통사가 거대 기업을 위해 재투자 비용까지 감당해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페북에서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구나 손쉽게 라이브 중계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오가는 영상들이 통신망에 엄청난 트래픽 부담을 준다"고 설명했다.
 
국내 이통사들이 투자에 난색을 표하는 배경에는 통신사업 환경 악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때 20%를 넘던 이통사 영업이익률은 최근 10% 안팎으로 떨어졌다. 이통사 한 관계자는 "통신사에게 고수익이 보장되던 시절에는 망을 확충할수록 산업 생태계가 커져서 콘텐트·플랫폼 사업자들과 윈윈할 여지가 많았지만 지금 이통사들은 성장 정체와 수입 저하에 시달리고 있다"며 "반면 트래픽을 많이 유발하는 콘텐트·플랫폼 사업자들은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투자 주체가 달라져야할 만큼 시장 환경이 변했다는 얘기다.
 
이통사들이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콘텐트나 플랫폼 분야에서 신사업에 속속 뛰어들지만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소비자 니즈(Needs) 파악에 능한 전문 콘텐트 기업들과 이통사 내부의 신사업 팀은 신상품 개발 속도와 소비자 만족도 면에서 경쟁 구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통사들의 반발에 대해 콘텐트 업계도 반론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이미 요금을 받으면서 인터넷 서비스 기업에 추가 비용을 내라는 주장은 이중 요금"이라고 주장한다.  
IT 전문가인 박용후 피와이에치 대표는 "통신 규제 당국이 미국 등의 움직임과 국내 ICT 산업생태계 활성화 등을 두루 감안해 입장을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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