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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개혁, 절차가 올발라야 명분이 산다

중앙일보 2017.05.23 03:01 종합 33면 지면보기
유길용사회2부 기자

유길용사회2부 기자

“목적이 옳기 때문에 절차엔 좀 하자가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깔린 것 같아 걱정이다.” 지난 21일 청와대가 김형연(51)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법무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에 관해 묻자 부장판사 출신 A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김 비서관의 청와대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일 사표를 냈고 대법원은 하루 만에 수리했다. 다음 날 청와대 발표가 있었다. 대법원은 “공적 사유에 따른 의원면직의 경우에는 사표가 곧바로 수리되는 예가 과거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전에 청와대와 교감이 없었다면 그렇게 빠른 처리가 가능했겠느냐”는 의문이 법원 내에서도 나온다.
 
김 비서관은 법원 내 진보 성향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로 활동했다. 인권법연구회는 사법부 개혁에 대한 학술행사를 개최하려다 법원행정처와 대립각을 세웠던 단체다. 그런 그가 문재인 정부의 법무비서관이 됐다는 자체가 상징적이다.
 
판사가 청와대로 ‘직행’한 게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강한승 서울고법 판사가 사직하자마자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임명됐다. 부조리를 청소하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같은 방식으로 사실상의 현직 판사를 청와대에 데려갔다는 것은 기묘한 데자뷔이거나 아이러니다. 적폐 청산을 외치면서 적폐적 수단을 동원한 셈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 전 판사가 청와대에 가기 위해 법복을 벗은 것을 두고 ‘청판(청와대 판사)’이란 말까지 나온다. 청와대 파견검사를 일컫던 ‘청검’에 빗댄 말이다. 1997년 검찰청법 개정 당시 현직 검사를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자, 이후 정권은 사표를 받아 청와대에 근무시킨 뒤 다시 검사에 재임용하는 편법을 썼다. 비판이 계속됐고 올 2월 검찰청법을 개정해 ‘꼼수’ 파견을 원천 봉쇄했다.
 
법조계에선 ‘청검’보다 ‘청판’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검찰은 엄밀히 말해 행정부에 속한 외청(外廳)이지만 사법부는 입법·행정부와 함께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대한변협 회장을 지낸 하창우 변호사는 “사법부 자체 개혁을 요구했던 판사가 법복을 벗고 청와대에 가서 사법부를 개혁하겠다고 하는 건 삼권분립의 기본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81%에 달한다. 소통과 공감에 실패한 전 정권에서 쌓인 체증을 ‘사이다’처럼 씻어주고 있어서다.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개혁의 동력은 강해진다. 굳이 편법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아도 일을 해낼 수 있다. 지금 국민이 바라는 개혁은 올바른 절차의 정정당당한 개혁이다.
 
유길용 사회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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