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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빠졌던 여성들 “아픔 나누며 한잔의 유혹 이겨요”

중앙일보 2017.05.23 01:58 종합 14면 지면보기
김정미(가명·57)씨의 지난 30년은 술독에 빠져버린 인생이었다.
 

여성 중독자 41만명 … 고백 들어보니
외로워서, 남편 외도에 … 술에 빠져
“술 참으려 머리카락까지 잘랐는데
보자기 뒤집어 쓰고 술 사고 있더라”
여성 중독자 모임서 금주 의지 다져
전문가 “맞춤형 상담 인력 늘려야”

6남매의 맏딸이었던 그의 삶은 외로웠다. 스무 살도 안 돼 의류공장 취업을 위해 고향을 떠난 그에게 술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매일 밤 소주 2병을 마셔야 잠이 드는 날이 이어졌다. 29세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의 외도로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한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서른 중반부터 다시 술을 찾았고, 끊으려는 노력도 해봤다. 딸의 하루 세 끼는 챙겨주는 엄마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이던 딸에겐 매일 1000원을 주고 소보로빵 세 개를 사오라고 했죠. 그게 엄마가 주는 하루 세 끼였습니다.” 술을 사러 가지 않으려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마구 자르기도 했지만 몇 시간 뒤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쓴 채 술을 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결국 딸이 자라 독립한 후에는 혼자 살게 됐다.
30년간 알코올중독을 겪었던 김정미(가명)씨가 지난 17일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고 있다. [최정동 기자]

30년간 알코올중독을 겪었던 김정미(가명)씨가 지난 17일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고 있다. [최정동 기자]

 
이러던 김씨가 다시 삶의 희망을 찾고 있다. 서울시 도봉구가 운영하는 여성 알코올중독자 모임 ‘새싹’ 덕분이다. ‘새싹’은 공통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경험을 고백하며 치유하는 ‘자조(自助) 모임’ 중 하나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여성들로만 구성된 알코올중독 자조모임이기도 하다. 김상준 도봉구 보건소장은 22일 “남성들 앞에서 사연을 털어놓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여성 중독자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6명이 참여하는 ‘새싹’ 여성들 대부분은 외로움 때문에 술을 시작했고, 중독에 빠진 이후엔 여성이라는 이유로 쉬쉬하다가 문제를 키웠다. 박인자(가명·59)씨는 “간경화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여자가 술에 중독됐다고 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 같아 병원에 다니질 못했다”고 털어놨다.
 
모임은 지난달 12일부터 매주 수요일 한 시간씩 도봉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거주 지역과 상관없이 알코올중독을 겪은 여성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김씨는 “같은 고통을 겪었던 여자들끼리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술을 끊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술의 유혹도 함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 내에서 느낀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술을 마시게 된 조진아(가명·37)씨는 새싹 모임에 나오면서 한 달 넘게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오랜 기간 금주하는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모임의 이름처럼 음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에 새싹을 틔우고 싶다”며 웃었다.
 
남성 중독자 줄어드는데 여성은 늘어
 
도봉구가 자치구 차원에서 여성 자조모임을 운영하는 건 여성 알코올중독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여성 알코올중독 추정 환자 수는 2011년 38만여 명에서 지난해 41만여 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남성 중독자는 118만여 명에서 98만여 명으로 줄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가사·육아·업무 등 복합적인 스트레스를 겪는 여성들이 현실 회피의 수단으로 술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족 해체와 1인 가구 증가도 여성 음주율을 높이는 이유 중 하나다. 여성이 남성보다 알코올에 취약하다는 점도 환자 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송선미 한국건강증진개발원 박사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게 분비되기 때문에 간경화·심장질환·유방암·우울증 등의 알코올 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새싹’처럼 여성을 위한 치료 프로그램이 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해국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알코올중독은 높은 의료수가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다른 정신질환에 비해 치료 접근성이 낮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여성 중독자를 맞춤형으로 상담하기 위해서는 훈련된 상담 인력이나 멘토 역할을 하는 여성 회복자를 중독센터에 배치하고 여성 자조모임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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