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의 지나치면 잔인"…김수남 검찰총장 퇴임사

중앙일보 2017.05.15 15:10
김수남(57·사법연수원 16기) 검찰총장이 15일 퇴임했다. 김 총장은 이날 오후 3시 대검찰청 강당에서 퇴임식을 끝으로 27년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났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판사로 임용됐던 3년을 더하면 30년간 입었던 법복을 내려놓은 셈이다.
김수남 검찰총장. [중앙포토]

김수남 검찰총장. [중앙포토]

 
김 총장은 2012년 수원지검장으로 있을 때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선동 사건을 지휘해 유죄를 이끌어냈다. 이후 중앙지검장과 대검 차장을 거쳐 2015년 12월 검사의 정점인 검찰총장에 올랐다.
 
대부분의 역대 총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2년의 임기를 채우진 못했다. 새로 들어선 정권에 의해 떠밀리는 모양새 대신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자신을 임명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한 그의 임기는 올해 12월까지였다. 지난 10일 조국 서울대 교수가 민정수석으로 임명된 지 하룻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김 총장이 이날 준비한 8쪽짜리 퇴임사 곳곳에는 아쉬움과 검찰을 향한 세간의 시선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났다. 4개의 격언과 시를 인용해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김 총장은 정의에 대한 만용을 경계하라는 당부와 함께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의 시를 소개했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화가 되지 않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잔인하게 된다(過乎仁 不失爲君子 過乎義 則流而入於忍人 故仁可過也 義不可過也)’는 문구다.
 
김 총장은 “수사에 있어서 소신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나만이 정의롭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 범죄자를 엄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를 지키고 인권을 옹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검의 한 간부는 “검찰을 적폐의 한 축으로 규정하고 개혁이란 칼날을 들이대는 현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김 총장은 “환부만을 도려내는 외과수술식 수사를 하고 있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참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는 명심보감의 구절을 인용해 김 총장 스스로 바르게 처신하려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사건도 사사로움 없이 정도를 걷고자 했고,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가면 언젠가는 국민들도 신뢰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검찰총장직을 수행해왔다”고 자평했다.
 
또 법학의 라틴어 격언인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를 인용해 “국민 신뢰 회복의 요체는 원칙과 절제, 청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검찰 개혁 논의와 관련해 “검찰개혁은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무엇인지가 기준이 될 것”이라며 “법조를 포함한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형사사법의 국제적 추세도 참고해 국민을 위한 올바른 방향의 검찰개혁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류시화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검찰을 ‘소금’에 비유하기도 했다.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이란 내용이다. 그는 “검찰이 우리 사회의 소금이 되어주길 바란다”며 인사를 마쳤다.
 
이날 퇴임식에는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 등 400여 명의 검찰 간부들이 참석했다. 후임 총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참석자들의 표정에는 담담함과 막막함이 엿보였다. 비(非) 검찰 출신이 차기 검찰총장으로 임명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검찰총장은 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 법무부장관의 제청과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후임자가 정해지기까지 적어도 한 달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검 관계자는 “검찰이 국민과 정치권으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 구성원들이 느끼는 서운함과 침통함은 비슷할 것”이라며 “총장이 직원들의 이런 심정을 다독이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라는 의미를 퇴임사에 담은 것 같다”고 말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역대 검찰총장 퇴임사에 담긴 검찰 수난사

"지난 12일 법무부장관이 피의자의 구속여부에 대한 구체적 수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심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2005년 10월17일 김종빈 34대 검찰총장)

 
김종빈 전 검찰총장의 퇴임사에서 '정치적 중립'이라는 표현은 총 10번 등장했다. 김 전 총장은 천정배 당시 법무부장관의 수사 지휘권 발동에 반발해 자진 사퇴했다. 천 전 장관은 2005년 10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아온 강정구 교수에 대한 구속 수사 의견을 올리자 이를 거부하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권 행사는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전 총장은 천 장관의 지시가 검찰권을 침해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약속도 합의도 지켜지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2011년 7월13일 김준규 37대 검찰총장)

 
김준규 전 검찰총장은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가 국회에서 파기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임기를 46일 남긴 상황이었다. 2011년 6월 20일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갈등하던 검찰과 경찰은 극적으로 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합의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수정해 의결됐다. 여야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 사항을 법무부령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수정하는 절충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해 홍만표 당시 대검 기조부장 등 대검 참모진과 일부 지방 검사들이 사의를 표명했다. 김 전 총장은 퇴임식 전 사퇴의 변을 통해 "검찰총장의 마지막 권한 행사로 (참모들의) 사직서와 사퇴 의사를 모두 반려한다"고 밝혔다.  
 

"저에게 가장 어려운 싸움은 내부의 적과의 전쟁, 바로 우리의 오만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 전쟁에서 졌습니다. 우리의 오만을 넘지 못하고 여러분의 이해와 도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2012년 12월3일 한상대 38대 검찰총장)

 
한상대 전 검찰총장은 사상 초유의 '검란 사태'로 불명예 퇴진했다. 2012년 김광준 전 부장검사의 10억원 대 뇌물수수 사건, 서울동부지검 소속 검사가 피의자와 성행위를 한 사건 등으로 위기에 몰린 한 전 총장은 검찰 개혁으로 이를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대검 중수부 폐지를 담은 검찰 개혁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재경 당시 대검 중수부장과 심각한 갈등이 불거졌다. 뒤이어 한 전 총장이 최 전 부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자 전국의 검사들이 총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한 전 총장은 검찰 간부와 평 검사의 연이은 용퇴 권유를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자진 사퇴했다.

"최고의 가장은 아니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빠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2013년 9월29일 채동욱 39대 검찰총장)

 
2013년 4월 임명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국정원 선거 개입 수사를 지휘하며 청와대와 정면 충돌했다. 2013년 9월 한 언론에선 채 전 총장이 혼외자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이를 감찰하겠다고 밝히자 채 전 총장은 사표를 제출했다. 지난 2일 대한변호사협회는 3년 6개월 만에 채 전 총장의 변호사 개업 신고서를 수리했다.
 
 
중도 사퇴한 검찰총장들에 비해 임기 2년을 채우고 퇴임한 검찰총장들의 퇴임사는 비교적 평이했다. 정상명 35대 검찰총장은 "검찰은 실체적 진실 그대로 밝혀야 한다"며 원론적인 표현을 썼고, 김진태 40대 검찰총장은 서정주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읊기도 했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