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북을 열며] 국민에 대해서만 의리를 지키면 된다

중앙일보 2017.05.15 02:56 종합 34면 지면보기
장혜수스포츠부 차장

장혜수스포츠부 차장

최근 페이스북이 ‘과거의 오늘(On this day)’이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오늘 날짜에 올렸던 과거 게시물을 모아서 보여주는 서비스다. 지난 9일 페이스북을 여니 타임라인에 2014년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한 남성잡지 표지의 패러디물이다. ‘의리’ 탤런트 김보성 몸에 홍명보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합성사진 옆으로 ‘의리의 화신, 홍명보’ ‘내 새끼들 데리고 사상 첫 원정 8강 간다!! 의리!!’ 등이 적혀 있었다.
 
2014년 5월 8일 홍 전 감독은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을 발표했다. 패러디는 홍 전 감독의 선택을 비꼰 것이다. 23명 중엔 감독 스스로 정한 선발기준에 못 미친 선수가 일부 있었다. 반면 기준을 충족한 몇몇 유력 후보는 엔트리에서 빠졌다. 최종 엔트리 면면을 보니 대체로 홍 전 감독과 청소년 대표 내지 올림픽 대표 시절 인연을 맺은 선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팬들은 ‘엔트리’를 ‘엔트의리’라 부르며 홍 전 감독 결정에 우려와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2014년 5월, 홍명보 당시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월드컵 엔트리를 발표하자 '의리'로 선수를 뽑았다며 네티즌들이 만든 패러디물. [인터넷 캡쳐]

2014년 5월, 홍명보 당시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월드컵 엔트리를 발표하자 '의리'로 선수를 뽑았다며 네티즌들이 만든 패러디물. [인터넷 캡쳐]

결국 한국 축구는 브라질에서 망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러시아와 1-1로 비겼고, 2차전에선 ‘승점 자판기’라던 알제리에 2-4로 무너졌다. 3차전에선 한 명이 퇴장당한 벨기에에 0-1로 졌다. 한국이 월드컵 본선 첫 승을 신고한 2002년 이후 1승도 못 거둔 첫 월드컵이 됐다. 팬들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3년 전 게시물을 보다가 두 명의 지도자가 떠올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연출가 거스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과 최근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디비전1 그룹A(2부리그)의 한국을 월드챔피언십(1부리그)으로 승급시킨 백지선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히딩크 감독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선수를 쓸 때 학연·지연·혈연 같은 연고를 배제했다. 이름값보다 소속팀이나 훈련장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로 판단했다. 한국 감독 임기 중 성적 부진으로 여론이 좋지 않을 때조차 처음 정한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백지선 감독 역시 용인술은 물론 지도자 철학이 히딩크 감독을 많이 닮았다. ‘백딩크(백지선+히딩크)’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히딩크 감독의 2002년 성공 비결을 스포츠계는 물론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배우고 따라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 제자인 홍 전 감독은 모든 걸 2002년 이전 상태로 되돌 렸다.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성공이 홍 전 감독을 독선적으로 만든 부분이 있다. 그 독선이 ‘의리’에 따른 결정을 옳은 결정이라 믿게 했다.
 
제19대 대통령선거가 끝났고 새 정부가 출범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가 잘할 것으로 기대하는 여론이 80%에 육박한다.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 구성 등 인사 문제와 시급한 현안 처리에 대해 호평이 이어진다. 성공적인 현재 상황이 독선을 불러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연고에 의한 ‘의리’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저 국민에 대해서만 의리를 지키면 된다.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