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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달빛 대통령 문재인

중앙일보 2017.05.15 02:55 종합 34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을 국제사회에 달빛 대통령으로 소개한 건 마이클 브린이라는 한국 연구자다. 그는 영국 ‘더타임스’의 서울 특파원 출신으로 한국 생활이 35년째라고 한다. 지난 4월에 『The new Koreans』라는 책을 펴냈고 미국의 외교전문 잡지 포린폴리시에다 “한국 민주주의의 분노한 신은 대중(people)”이라는 촛불정국 분석 기사를 썼다. 브린 작가는 문 대통령이 당선된 날 월스트리트저널에 ‘한국이 달빛 시대로 진입하다’는 기고문을 실었는데 신임 대통령의 영자 성(姓)이 Moon이라는 점에 착안해 Moonshine(달빛)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달빛 시대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햇볕정책(Sunshine policy) 전사(前史)가 없었다면 별로 재미없는 조어(造語)였을 것이다. 햇볕과 달빛의 묘한 대비가 2000년 이후 북핵(北核)을 둘러싼 논쟁적 역사를 떠올리고 한국인의 오래된 정서를 건드리는 측면이 있기에 그럴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김정은에겐 햇볕보다 달빛이 제격
표 안 찍은 59% 마음까지 헤아려야

브린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달빛은 햇볕을 계승하되 현실적으로 변용한 정책이다. “햇볕정책과 비교하면 달빛은 좀 더 현실적이다. 문 대통령의 주된 관심은 교착상태를 푸는 데 있다. 신임 대통령은 한국이 대북정책을 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싶겠지만 어려울 수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문 대통령과 협조해야 한다.”
 
햇볕은 김·노 전임 대통령들이 김정일을 은둔의 왕국에서 끌어내기 위해 미국과 맞서가며 추진한 정책이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북핵 개발의 돈줄이 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달빛 시대에 문 대통령은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김정은을 다루도록 요구받고 있다. 김정은은 한국 정부가 단독으로 상대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자기 아버지보다 강한 존재로 컸다.
 
어제도 사정거리가 하와이로 추정되는 미사일을 동해상에 날려 보냈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함께 그의 목줄을 죄고 있는 상황에서 벌인 도발이니 새로 들어선 한국 정부의 움직임 따위는 관심 없다는 투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중국 등 4강에 한꺼번에 특사를 보내 공통의 대북 국제전략을 도출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구상은 적절하다. 달빛은 햇볕보다 덜 강렬하지만 더 현실적이고 더 국제협력적이다. 칠흑같이 어둡던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때와 비교해 은은한 빛을 발산하는 점에서 김정은의 시선을 붙잡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브린이 던진 달빛 시대는 대북정책을 넘어 문재인 정치 전체를 잘 묘사하는 듯하다. 그의 취임 나흘 동안의 행적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문 대통령의 행동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취임 선서날 여의도에서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차 지붕 위로 몸을 내밀고 시민을 향해 손을 내젓는 모습이 그랬다. 홍은동 사저 앞에서 주민들과의 만남이나 청와대 기자실에서 인사 설명회 하는 장면, 대통령 집무실을 비서동으로 옮긴 것 등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59%의 유권자 마음까지 흔들어놓을 만했다.
 
달빛 하면 언제나 넉넉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 보름달도 있지만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도 있다. 1920년대에 요절한 천재 작가 나도향이 그믐달을 그렇게 표현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 가운데 ‘세월호 재조사’ ‘최순실 사건 재수사’는 잘못 진행되면 비수를 품은 그믐달 정치가 될 수 있다. 3년간 수도 없이 되풀이해 온 일을 또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느냐고 생각하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새 정부의 우선순위는 다수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은은한 달빛 정치여야 하지 않을까. 두 사건을 다시 조사하자는 뜻이 정치·사법적으로 이미 사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부관참시하자는 것으로 비춰지면 곤란하다. 대중적 분노 에너지를 다시 폭발시켜 또 다른 전직 대통령마저 법정에 소환하겠다는 급진 그룹에 청와대가 행여 끌려가지 않길 바란다. 달빛 정치에 보름달은 많고 그믐달이 적다면 좋겠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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