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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운동권 상징 영초 언니, 그녀의 잊혀진 삶 되살렸다

중앙일보 2017.05.15 01:00 종합 27면 지면보기
40년 묵은 상처를 글로써 끄집어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그러나 막상 옛날 이야기를 할 때는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잊지 않았다. [손민호 기자]

40년 묵은 상처를 글로써 끄집어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그러나 막상 옛날 이야기를 할 때는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잊지 않았다. [손민호 기자]

“저에게 영초 언니는 담배를 처음 가르쳐준 ‘나쁜 언니’였고 사회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었어요. 1970년대 운동권의 상징적인 인물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아요. 그때 영초 언니와 함께 활동했던 수많은 유력인사가 ‘운동권 팔이’를 해서 잘살고 있지만, 언니는 완벽하게 잊혀졌어요. 저라도 그녀의 역사를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회고록 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같이 자취했던 고대 72학번 선배
사회 모순에 맞섰던 젊은 날 기록
부끄러운 얘기도 거침없이 털어놔

㈔제주올레 서명숙(60) 이사장이 회고록 『영초언니』를 펴냈다. 책에서 서씨는 40년이나 이어진 한 인연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그 인연의 주인공이 영초 언니, 천영초(64)씨다. 고려대 76학번 서명숙에게 이른바 의식화 교육을 한 같은 학교 72학번 선배이자 자취방 동숙인이다. 서씨는 영초 언니의 기구한 삶을 통해 제 젊은 날을 돌아본다.
 
“4·3 사건 때문인지 제주도 사람은 우파가 대부분이었어요. 저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손수 지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반에서 1등으로 외웠고, 71년 대통령 당선 소식을 듣고 ‘각하, 축하 드립니다!’라고 일기를 쓴 다음에야 잠에 들었어요. 물정 모르던 제주도 ‘촌것’이 대학 학보사 기자가 됐고 영초 언니를 만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됐어요.”
 
서씨는 79년 ‘산천초목’ 사건이라 불리는 공안당국의 기획수사로 구속돼 약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 사건의 주동자(로 몰린 인물)가 천씨였다. 책은 서씨와 천씨, 그리고 ‘가라열’이라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 여학생들의 이야기다. 서씨는 학생들을 고문한 일부 인물을 가명으로 쓴 것 빼고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고, 자신이 겪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그러나 서씨가 길어 올린 20대의 기억은 너무 파란만장해서 극적이다. 몇몇 대목은 개연성 떨어지는 소설처럼 읽힐 정도다.
 
“한 달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어요. 감금됐을 때 자살을 시도했었지요. 80년 5월 광주에서 큰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을 땐 언니랑 같이 광주에 내려갔어요. 제가 수감됐던 성동구치소에 만삭의 YH무역 노조지부장이 들어와 함께 지내기도 했고요. 일부러 안 한 얘기는 있지만 억지로 만든 얘기는 없어요.”
 
부끄러운 일화도 서씨는 거침없이 털어놨다. 이를테면 불법 감금한 경찰이 전기 고문을 하겠다고 끌고나갔을 때 바지에 오줌을 지린 일, 감방 변소에서 재래식 변기에 얼굴을 박고 몰래 담배를 피웠던 일, 운동권 동지로 만난 남학생에게 먼저 감정을 드러낸 일 등등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일화도 숨기지 않았다. 서씨는 “내가 올해 환갑”이라며 “뭐가 아쉬워 숨기겠느냐”고 되물었다. 덕분에 유시민·이해찬·심재철 등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유명인사와의 짤막한 인연도 엿볼 수 있다. 알고 보니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씨의 결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7년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에 원고의 절반 이상을 마친 상태였어요. 언젠가는 언니 얘기를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수의를 입은 최순실씨가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보고 40년쯤 전 언니가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때 원고 정리를 시작했어요.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민주주의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이제 언니 얘기를 할 차례다. 언니는 지금 많이 아프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언니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뇌를 다쳤다. 사고 소식을 듣고 캐나다로 달려간 서씨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지금 경기도 양평에 사는 언니는 상태가 나아져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지능까지 회복했단다.
 
서씨는 인터뷰 도중 수없이 울었다. 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끝내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언니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단답형 대답을 되풀이하던 언니가 노래를 불렀다. 서씨도 기억하지 못하는 40년 전 운동권 노래였다. 서씨는 수화기를 든 채 오열했다.
 
“언니, 기억하자. 언니가 살았던, 우리가 살았던 시대를 꼭 기억하자.”
 
제주=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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