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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7080 꿈 키워준 태권V, 전 세계에 50만 개 팔린 타이타닉

중앙일보 2017.05.13 01:00 종합 13면 지면보기
아카데미과학이 이끈 국산 프라모델의 변천사 
1980년대엔 전국 어느 문방구나 진열대에 태권V와 마징가Z가 당당히 서 있었다. 두 로봇은 그 시절 초등학생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린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의 양대 산맥이다. 아이들은 학교 다녀오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한 벽 가득 쌓여 있는 프라모델을 보며 꿈을 키웠다. 그곳엔 제2차 세계대전을 누볐던 탱크·전투기·군함, 그리고 지구 평화를 지켜주던 각종 로봇들이 있었다. 독수리 5형제 모함, 울트라맨, 철인 28호, 로봇 짱가, 공룡대전쟁 아이젠버그, 메칸더V 모형을 손에 든 아이들이 로봇에 빙의(憑依)된 듯한 소리를 지르며 동네를 누볐다.
김명관 아카데미과학 대표가 지난달 4일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본사 사장실에서 독수리 불새 모함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사무실은 수백 종류의 프라모델로 가득했다. [김현동 기자]

김명관 아카데미과학 대표가 지난달 4일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본사 사장실에서 독수리 불새 모함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사무실은 수백 종류의 프라모델로 가득했다. [김현동 기자]

 
국내 프라모델 산업은 7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작권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일본 인기 제품을 그대로 본떠 제품을 만들었다. 제품은 조악했다.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던 로봇, 고무줄을 감아서 움직이던 자동차…. 그런데도 아이들은 열광했다. 주문이 물 밀 듯 밀려오자 업체도 늘었다. 80년대 후반 프라모델 제조업체는 100곳을 넘어섰다.
 
초기엔 건설장비나 해외 명차가 인기였다. TV 보급이 늘며 만화영화 주인공들이 프라모델의 강자로 떠올랐다. 문상수 아카데미과학 이사는 “70년대 말엔 개당 50원 하던 미니 건설차 시리즈나 직접 제작하는 모터 자동차 등이 인기였는데, 80년대 들어서며 태권V나 건담 같은 로봇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80년대 초반 로봇 프라모델의 강자로는 아카데미과학·에이스모형·노벨과학·세미나과학이 꼽힌다. 경쟁이 치열했지만 아카데미과학의 SF과학 시리즈가 단연 돋보였다. 독수리 5형제 불새 모함, 우주탐험대 알파 기함, 마하 1호, 지하탐험대의 킹 모글라스 탱크는 지금도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서 인기다. 김명관 아카데미과학 대표는 “독수리 5형제 불새 모함은 중고나라에서 최고가가 20만원을 기록할 정도”라며 “나이와 공간을 넘어서는 뭔가가 프라모델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98년 아카데미과학 개발팀 연구원들이 타이타닉호 모형의 조립 상태를 조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아카데미과학 개발팀 연구원들이 타이타닉호 모형의 조립 상태를 조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80년대 중반 들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던 프라모델 시장이 달라졌다. 흐름을 주도하는 업체들이 나타났다. 아이들 사이에선 ‘하늘엔 아이디어, 땅에는 아카데미’라는 말이 돌았다. 날개 달린 제품은 아이디어회관, 전차와 로봇 등 땅에 붙어 있는 것은 아카데미과학을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디어회관은 방대한 항공기 컬렉션을 자랑하는 업체였다. 초등학생에게 인기를 끈 제품으로 민간 경비행기 세스나, 2차 세계대전 주력기인 콜세어·썬더버드·수투카 등이 있었다. 여기에 휴이 코브라 헬기, 영화에 나온 블루썬더, 에어울프까지 만들어 팔았다.
 
프라모델 초기엔 ‘탱크’ 하면 합동이었다. 합동과학이 70년대에 출시한 M41 워커불독 전차는 한국 최초의 밀리터리 프라모델로 꼽힌다. 합동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타이거와 팬저 전차도 소개했다. 하지만 품질 개선이 더뎠다. 불량률이 높아 ‘합동 제품 3개가 있어야 탱크 한 대 만들 수 있다’는 원성을 들었다. 아카데미과학에 지상전의 강자 자리를 물려준 이유다. 아카데미과학은 원래 해양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업체였다. 로마 갤리선, 미국 미주리 전함,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을 만들었다.
 
아카데미과학과 아이디어회관 모두 일본 업체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카데미는 주로 일본 다미야 제품을 카피했다. 다미야는 세계 최대 군용 프라모델 제작사다. 함선부터 전차, 전투기까지 다양한 컬렉션이 있다. 아카데미과학이 제품군을 함선에서 전차와 전투기로 넓혀간 배경이다. 아이디어회관은 일본의 항공기 전문 프라모델 업체 하세가와의 제품을 카피했다. 주력 제품군이 항공기에 머문 이유다.
 
80년대 후반 인기 프라모델은 모형 총이다. 편을 갈라 상대에게 BB탄을 쏘아대는 아이들이 놀이터를 점령했다. 권총은 콜트·루가·매그넘, 엽총은 레밍턴, 그리고 소총 M-16이 불티나게 팔렸다. 모형 총기를 제조하는 업체는 12곳으로 늘었다. 전문 업체로 삼성교재·강남모형, 기존 프라모델 기업 중에선 합동과학과 아카데미과학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아카데미과학 연구진은 고장이 적고 연사 속도가 빠른 콜트 개발에 성공한다. 88년산 제품 가격은 5000원. 당시엔 꽤 고가였지만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폭주했다. 문상수 이사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카데미 제품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 콜트”라고 자신했다. 그는 “지방으로 보내는 제품을 청량리역과 용산역에서 실어 보냈는데, 산더미만큼 제품을 쌓아놓고 한번에 열차 한 량을 전부 채워 보내곤 했다”고 말했다. 아카데미과학 직원 사이에선 “콜트 팔아서 수유리 공장 지어 올렸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아카데미과학은 총기류 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92년 필리핀에 생산공장도 설립했다. 한국 프라모델 기업이 세운 첫 번째 해외 공장이다. 지금도 필리핀 공장은 가동 중이다. 이곳에서 콜트·리볼버·M-4 모형 총기를 제작해 미국 월마트에서 판매한다.
태권V(왼쪽)와 건담은 7080세대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최고의 인기 프라모델이었다.

태권V(왼쪽)와 건담은 7080세대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최고의 인기 프라모델이었다.

 
90년대 들어 프라모델 업계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다. 컴퓨터 게임이다.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이 늘었고, 동네 곳곳에 PC방이 등장했다. 수많은 인터넷 게임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하나의 악재가 덮쳤다. 정부가 98년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일본 업체들의 저작권 요구가 거세졌다. 대표 제품이 건담이다. 30년 넘게 각종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나오며 수백 종류의 로봇 모델을 거느리던 초대형 상품군이었다. 당시 한국 문방구 진열대엔 칸담·고담·간담이 있었다. 건담을 번역하며 업체마다 제각기 이름을 달리 붙인 탓이다. 아카데미과학의 칸담, 합동과학의 고담, 에이스모형의 간담이 그나마 만들 만한 제품이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국내 프라모델 업체들은 건담의 원제작사인 반다이의 경고장을 받았다. 불법카피 제품을 판매하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반다이의 경고에 불구하고 짝퉁 제품을 제작·유통한 업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품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 탓에 결국 시장에서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모바일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사회문제가 됐다. 여기에 저출산으로 아이들 수가 매년 줄었다. 조기교육 바람으로 초등학생들도 학원을 여러 곳 다니는 세상이었다. 프라모델 업체들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메이저 업체 중 지금 살아남은 곳은 아카데미과학 하나다. 6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 중인 아카데미과학은 지난해 32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품질을 개선하며 해외 시장을 개척한 덕에 ‘추운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다. 타이타닉 모델이 좋은 예다. 아카데미과학은 70년대에 이미 타이타닉 금형을 만든 경험이 있다. 95년 해외시장 개척용으로 금형을 다시 제조했다. 100분의 1, 350분의 1, 700분의 1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97년 제품을 막 생산할 무렵 영화 타이타닉이 전 세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프라모델 업계에도 타이타닉 열풍이 불었다. 아카데미의 타이타닉은 전 세계에 50만 개가 팔려 나갔다. 아카데미과학 공식 최고 판매 기록이다. 침몰한 타이타닉이 침몰의 위기에서 아카데미를 구한 셈이다. 회사에선 제임스 캐머런 감독에게 감사패나 타이타닉 모형을 선물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문 이사는 “제작사를 통해 모형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정중히 사양하시더라”며 “타이타닉처럼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S BOX] 2차대전 때 아군·적군 무기 식별 위한 교재로 프라모델 활용
프라모델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이후 미국, 독일, 일본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등장했다. 기계 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이다. 정교한 금형 기술이 필요한 산업이라서다. 지금은 한국 업체도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초의 프라모델은 1936년 영국의 IMA사가 만든 군용 트럭 모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군과 적군 무기를 식별하기 위한 교육 교재였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회의에 사용한 모형 탱크와 비행기, 군함을 미군 장교들이 눈여겨봤다. 종전 후 이들이 프라모델 회사를 차린다. 미국의 호크와 엠파이어의 탄생 배경이다. 미국 업체들은 소비자가 직접 조립할 수 있게 조립 제품을 출시하며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의 레벨, 영국의 에어픽스, 프랑스의 헬러 SA가 등장해 정교한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56년 설립한 독일의 레벨은 지금도 마니아 사이에서 최고로 꼽힌다. 전차에 올라탄 병사의 얼굴 표정까지 신경 쓰는 정교한 모델을 선보이며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일본의 하세가와와 다미야도 초기엔 레벨의 카피 제품을 만들며 성장했다.
 
지금 세계 1위 업체는 일본의 다미야다. 60년 첫번째 플라스틱 모형으로 일본 전함 야마토를 출시했다. 항공기 분야에선 하세가와를 최고로 쳐준다. 프라모델 시장을 키운 곳도 일본이다.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 정교한 기계 제작 기술력, 여기에 수집광적인 마니아층까지 있었던 덕분이다.
 
조용탁 기자 yt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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