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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페미니즘 전사’ 원더우먼의 탄생 비밀

중앙일보 2017.05.13 01:00 종합 19면 지면보기
원더우먼 허스토리
질 르포어 지음
박다솜 옮김, 윌북
464쪽, 1만7500원
 
걸크러시(Girl Crush)의 시조는 이 언니 아닐까. 1941년 미국에 등장한 뒤 76년 긴 세월을 수백만 명 팬을 거느리며 홍일점 슈퍼히어로의 전설을 이어온 원더우먼(Wonder Woman)이 그 분이다. 강하고 똑똑하며 아름답고 용감한 여성 캐릭터로 세계 만화사에 불멸의 신화를 쓴 원더우먼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원더우먼 허스토리(원제 The Secret History of Wonder Woman)』는 여느 대중문화 아이콘과 달리 페미니즘의 전사(戰士)이자 선동가로 창작된 원더우먼의 비밀스런 역사를 파헤친다.
 
이 경이로운 여성 영웅은 다재다능하고 박식한 한 남성 학자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다. 거짓말 탐지기 발명자로 알려진 심리학자 윌리엄 몰튼 마스턴(1893~1947)이 원더우먼의 아버지다. 마스턴은 하버드대 재학 시절에 여성 인권 신장 단체를 이끌며 여성이 세계를 지배해야 마땅하다는 믿음을 굳혔고, 모계사회가 불가피하다는 자신의 주장 근거로 여성의 도덕적 우월성을 들었다. 그는 여성참정권 운동에 나선 ‘신여성’, 산아제한을 내건 페미니스트를 사랑했다.
 
1970년대 미국드라마 ‘원더우먼’에 출연한 린다 카터는 섹시 스타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1970년대 미국드라마 ‘원더우먼’에 출연한 린다 카터는 섹시 스타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마스턴은 미국 사회에 만화책이 ‘국가적 수치’라는 만화 유해설이 확산되던 1940년에 새 만화잡지 창간을 준비하던 ‘DC 코믹스’의 편집자문위원을 맡았다. 대학생 때 생활비 마련을 위해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만화책이 최고의 심리학적 선전물이라며 새로운 예술 형식을 즐겼던 마스턴에게 만화 주인공을 창조하는 일은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만화에 대한 공격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성 슈퍼히어로”라며 “여성이 세상을 구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마스턴 박사가 원더우먼을 창조한 목적은 아동과 청소년에게 강하고 자유롭고 용감한 여성의 기준을 만들어주기 위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통념에 대항하기 위해, 소녀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지금껏 남성들이 독점해온 운동, 직업, 전문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격려하기 위해서다.”(310쪽)
 
지은이 질 르포어(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는 ‘피임과 낙태의 정치화’에 대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원더우먼과 페미니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알아채고 4년에 걸쳐 마스턴 가문의 자료를 이 잡듯이 뒤졌다. 이 책이 마스턴의 전기이면서 원더우먼의 탄생기가 된 까닭이다. 다음 달 국내 개봉하는 갤 가돗 주연의 영화 ‘원더우먼’이 마스턴이 그려낸 ‘페미니즘 투쟁의 상징’에 얼마나 다가갈지 궁금하다.
 
[S BOX] 원더우먼의 아버지 마스턴은 누구?
윌리엄 몰튼 마스턴은 그가 만든 원더우먼처럼 베일에 가린 괴짜였다. 심리학자, 변호사, 영화 제작자로 좌충우돌했다. 그는 정식 결혼한 부인 엘리자베스 할러웨이, 제자였다가 연인이 된 올리브 번과 그들이 낳은 네 자식을 기르며 한 지붕 아래 살았다. 올리브 번의 이모가 유명한 페미니스트 마거릿 생어였다. 고대 그리스의 여가장제(女家長制) 이상국가 아마존을 현실에 세운 셈이다. 그들은 은폐와 거짓말의 대가였는데 이 가족의 삶이 바로 ‘새로운 유형의 여성상’ 원더우먼과 그 이야기에 반영됐다.
 
마스턴은 덩치가 크고 화가 나면 고함을 질러대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이었다. 1947년 5월 2일, 54세에 그가 암으로 숨지고 난 뒤 올리브 번과 엘리자베스 할러웨이는 여생을 함께 보냈다. 마스턴의 사후 25년이 되던 1972년 봄, 원더우먼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주동이 돼 만든 여성잡지 ‘미즈’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함으로써 20세기 후반 페미니즘의 발동을 걸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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