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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5·18문학상 끝내 받지 않기로

중앙일보 2017.05.08 17:04
구제역 살처분 돼지를 통해 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김혜순 시인.

구제역 살처분 돼지를 통해 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김혜순 시인.

중견 시인 김혜순(62)씨가 끝내 5·18문학상을 받지 않기로 했다. "오월정신에 맞지 않는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는 문단 일부의 비판에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상을 운영하는 5·18기념재단(이사장 차명석)에 따르면 "시집 『피어라 돼지』로 올해 5·18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혜순 시인이 5·18 정신의 무거움을 생각할 때 정중히 사양한다"고 재단에 알려 왔다고 8일 밝혔다.
 

모더니즘 계열 김씨가 선정되자 진보 진영 일부서 비판
"오월 정신 무거움 생각해 사양" 밝혔지만 논란 부를 듯

재단은 지난달 26일 김씨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고통과 재난으로 뒤덮인 작금의 세계에서 말이 어떻게 끙끙 앓는지를 최고의 수준에서 보여준 시집"이라는 심사평도 함께 공개했다. 심사에는 문학평론가 황현산·김형중, 시인 김진경·나희덕, 소설가 임철우씨가 참여했다. 
『피어라 돼지』

『피어라 돼지』

하지만 김씨의 선정 사실이 알려지자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비판론이 불거졌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낸 정우영 시인은 "충격적""수긍하기 어려운 선정"이라며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광주와 오월정신을 아무리 새롭게 해석한다 해도 난 김혜순 시집 수상에 동의할 수가 없다 (…) 내 관점으로 그는 초현실을 언어로 닦아세우는 시인"이라며 "5·18문학상마저 언어주의자에게 주어지다니. 내게 이 선정은 삶으로 문학하는 작가들에 대한 모욕처럼 다가온다. 모더니즘의 활개가 참으로 무섭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김씨 시집의 내용을 문제 삼기도 했다. 구제역에 의해 살처분된 돼지들을 고통과 재난의 연속인 세상에서 핍박받으며 살아온 민중과 동격으로 놓은 시의 내용이 민중에 대한 모독이라는 지적이다.
 
김혜순 시인은 처음에는 수상을 고사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의 만류에 마음을 돌렸다가 다시 받지 않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8일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광주의 한 지인으로부터 SNS 상에서 내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상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사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심사에 참여한 평론가 황현산씨는 "김씨의 뜻을 재단이 받아들였다"며 올해 본상 수상작이 없음을 확인했다.
 
5·18문학상은 재단이 2005년 시작했다. 오월정신을 계승한 오월문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시·소설·동화 등에 걸쳐 신인상을 운영해오다 지난해부터 기성 작가도 심사 대상으로 하는 본상을 만들었다. 지난해 본상 수상작은 세월호 참사기록위원회 기록단의 단행본 『금요일엔 돌아오렴』이었다.
 
김씨의 고사로 인해 수상작 선정을 둘러싼 갈등이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겠지만 후유증은 남을 것으로 보인다. 특정 문학상의 취지에 걸맞는 작품 자격 기준을 얼마나 엄격하게 설정해야 하는지, 보다 근본적으로는 문학작품의 작품성이나 경향성 자체를 뚜렷하게 획정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시집의 표제시 '피어라 돼지' 전문.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재판도 없이/매질도 없이/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포승줄도 수갑도 없이//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무덤 속에서 운다/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부끄러운 거예요!/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피어라 돼지!/날아라 돼지!//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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