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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형형색색 5색 가치 시대

중앙일보 2017.05.08 02:33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조기 대선이라는 통조림같이 압축된 시간-.
 

패권교체·노동사회·서민보수도 필요
사표는 없다 … 승패보다 귀한 ‘가치’

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선택을 준비한다. 시간의 꼭지를 딴 뒤엔 어떤 운명이 전개될까. 누구는 설렘으로 누구는 두려움으로 주시하고 있다. 5월 9일 자정,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과거에 있던 정권인수 기간이 이번엔 없다. 전혀 새로운 정치 환경이 쑥 솟아오를 것이다. 단기적으로 한국 사회가 일시 쇼크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불복과 폭력, 급진과 불법은 꿈속에서라도 지워버리자.
 
중장기적으로 한국의 유권자는 1당 지배(1948년 건국~87년 전두환 정권의 종말)에서 2당 체제(1990년 3당 합당~박근혜 정권의 종말)를 거쳐 이제 3당 이상의 다당제 정치를 펼쳐 갈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번에 나선 다섯 명의 유력 주자들은 저마다 강인한 색깔을 보여줬다. 그냥 소멸하기엔 아까운 정치 자산들이다. 문재인의 ‘적폐 청산’은 압도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유효 득표율 40%를 넘길지 미지수다. 40% 수치는 선거 뒤 정치 지형을 도로 2당 체제냐, 다당제 정치로 갈 것이냐를 가를 기준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홍준표의 ‘친북 저지’, 안철수의 ‘패권 교체’는 각각 충성스러운 지지 기반을 갖는다. 얼추 20%씩으로 추정됐는데 ‘여론조사 깜깜이’ 터널을 관통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심상정의 ‘노동이 당당한 사회’와 유승민의 ‘가치를 추구하는 서민 보수’는 경이로운 실험이다. 둘이 합해서 10% 미만이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15~20% 근처까지 가게 되면 한국 정치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다. 심상정의 정의당은 일반 대중이 대거 당원으로 입당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유승민의 바른정당은 사상 처음으로 젊은 층의 사랑을 받는 개혁적 보수당의 재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박근혜의 몰락, 보수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반전 드라마에 참여하면서 가치(價値)정치의 가능성을 보았다. 법과 상식을 우습게 여기고 힘과 세력으로 우격다짐하면 다 되는 줄 아는 패권 정치의 비참한 결말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교훈을 문재인의 적폐 청산 캠프가 진지하고 겸허하게 배웠으면 한다. 말이 좋아 적폐 청산이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자기만 옳다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마구 칼날을 휘두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무슨 혁명정부처럼 숙청 대상을 정해놓고 정치 보복을 자행하면 나라는 순식간에 결딴나고 말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문 캠프는 엊그제 ‘적폐청산 특별조사위’ 설치를 ‘공공 일자리 81만 개 창출’보다 앞세워 우선순위 1번 공약으로 끌어올렸다. 홍준표의 친북저지 캠프 역시 아직도 박근혜의 어두운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박도 품으랴, 탈박도 안으랴.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박근혜 패권과 결별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그들의 무신경에 질려버렸다.
 
이런 일들이 역설적으로 승패보다 가치 투표를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미 정리되어야 할 최악의 정치 세력은 사법적으로 단죄됐다. 동화적 비유로 말하자면 선과 악의 싸움은 끝난 것이다. 최악이 제거됐기에 유권자가 자신의 생활 철학과 취향에 따라 선호 후보를 선택한다고 해서 죄의식을 가질 이유는 사라졌다.
 
1, 2위 후보들은 3, 4, 5위 후보를 찍으면 사표(死票), 즉 의미 없는 표가 된다고 선전하지만 편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시대는 세력 정치냐, 가치 정치냐를 한국의 유권자에게 묻고 있다. 1, 2위로 표가 쏠리면 2당 구도가 될 것이고 3, 4, 5위한테 비중 있게 나눠지면 다당 체제로 재편될 것이다. 이제까지 정계 개편은 정치 공급자들의 이합집산으로 이뤄졌다. 지금부터 정계 개편은 정치 수요자인 유권자가 투표의 힘으로 디자인하게 된다. 바야흐로 승패보다 가치의 시대다. 적폐 청산, 친북 저지, 패권 교체, 노동사회, 서민 보수의 가치가 진열대에 늘어서 있다. 형형색색 5색 가치가 공존하는 관용의 시대를 보고 싶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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