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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둘로 갈라진 프랑스 대선 … “최악 막으려 차악 찍었다”

중앙일보 2017.05.08 02:30 종합 10면 지면보기
김성탁 특파원 파리 투표현장 르포
7일 파리 1구 초등학교 투표소 앞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기욤(왼쪽)과 그의 친구들이 대선 결선투표를 마친 뒤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의 포스터 앞에 섰다. 뒤의 기호 2번은 마린 르펜 후보. 기욤은 극좌 장 뤼크 멜랑숑의 지지자였으나 르펜의 당선을 막기 위해 마르롱을 찍었다고 했다. [파리=김성탁 특파원]

7일 파리 1구 초등학교 투표소 앞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기욤(왼쪽)과 그의 친구들이 대선 결선투표를 마친 뒤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의 포스터 앞에 섰다.뒤의 기호 2번은 마린 르펜 후보. 기욤은 극좌 장 뤼크 멜랑숑의 지지자였으나 르펜의 당선을 막기 위해 마르롱을 찍었다고 했다. [파리=김성탁 특파원]

프랑스와 유럽의 운명을 가를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가 7일(현지시간) 실시됐다. 친 유럽연합(EU)과 세계화의 에마뉘엘 마크롱(39), 반 EU와 국수주의의 마린 르펜(48). 프랑스 최연소 대통령과 최초의 극우 성향 여성 대통령으로 각각 주목받으며 치열하게 맞붙었다. 지난 2주 결선투표기간 프랑스는 마치 ‘두개의 프랑스’같았다. 대선 이후 프랑스는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프랑스가 될 것이란 전망이다.
 

1차서 멜랑숑·피용 찍은 사람들도
“르펜은 파시시트 … 마크롱에 투표”
도심서 멀어질수록 르펜 지지 경향
사회·공화 양당구도 60년 만에 붕괴
정치개혁 거센 바람 불어닥칠 듯

7일 오전 10시쯤 도심인 1구의 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 투표소의 위치를 안내하는 포스터에 누군가 ‘당신이 국민전선(FN) 지지자라면 이것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적어놨다. 투표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투표를 하고 나온 아니 줄리아니(70)는 마크롱을 찍었다고 밝혔다. 그는 “마린 르펜이 공화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선거 때 많이 썼는데 난 속지 않는다”며 “르펜을 떨어뜨리려고 어쩔 수 없이 마크롱에게 표를 줬다”고 말했다. 마크롱에게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마크롱은 친기업적이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르펜에 반대하기 위해 찍어주지만, 마크롱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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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투표장을 찾은 도미니크 파르도(57)는 “원래 피용을 지지했는데 르펜이 될까 봐 마크롱을 찍었을 뿐 아무런 기대를 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아내 베로니크(54)은 “나도 피용 지지자인데 마크롱과 르펜 두 사람을 도저히 찍을 수 없어 백지 투표하고 나왔다”고 했다. 대학생인 딸 엘렌느(18)만 “중도 정치를 제대로 할 것 같아 1차에서부터 마크롱을 지지했다”고 밝혔다.
 
투표장을 나오던 마리 엘리자베스(69)는 취재진을 보자 일부러 다가와 “르펜은 파시스트”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콜레드 리븐(84)도 “과거 어두운 시절을 알고 있는 우리 같은 연령대는 르펜의 이데올로기를 알기 때문에 절대 찍어줄 수 없다”고 말했다.
 
1차에서 극좌 장 뤼크 멜랑숑 후보를 지지했다는 기욤(34)도 “르펜이 집권할까 봐 어쩔 수 없이 마크롱을 택했다”며 “마크롱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점차 잡아나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근 대형 쇼핑몰에 마련된 또 다른 투표소 주변에는 총으로 무장한 군인 네 명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모든 투표소마다 안전 요원이 배치됐고, 입장할 때 가방을 일일이 검사했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다. 이 곳에서 투표를 한 공무원 필리프(45)은 “전 세계를 고려하는 마크롱의 자세가 마음에 든다. 그는 친 유럽연합(EU)이지만 개혁을 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선거에선 대도시 중심에서 멀어질 수록 르펜을 지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낙후된 공업지역 등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역 주민들이 그가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파리 외곽지역 투표소에서 투표한 카스텔(51)은 “르펜이 경제 정책에서 잘 할 지는 모르지만 안보에 대해선 확실히 할 것”이라며 “EU를 탈퇴하지 않더라도 국경은 세워야 하며, 프랑스 국적을 갖지 않은 외국인은 피부색을 막론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자와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파리 북부 포르트 드 클리냥쿠르역 인근 벼룩시장에서 만난 여성은 “르펜이 당선되면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 마크롱을 찍겠다”고 말했다. [파리=김성탁 특파원]

이민자와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파리 북부 포르트 드 클리냥쿠르역 인근 벼룩시장에서 만난 여성은 “르펜이 당선되면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 마크롱을 찍겠다”고 말했다. [파리=김성탁 특파원]

그는 “프랑스인들이 그들을 위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투표소에서 만난 이들 중 르펜을 찍은 이들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보였다. 한 유권자는 “누구를 찍었는지 밝히고 싶지 않다”면서도 “사회주의자가 너무 많아 마크롱이 당선되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표 이틀 전까지 여론조사는 마크롱의 당선 가능성을 점쳤다. 5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마크롱의 지지율이 63%까지 올라 37%에 그친 르펜과 20%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였다.
 
이번 대선은 이미 ‘21세기판 프랑스 혁명’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정치 60년을 양분해온 사회당과 공화당 후보가 모두 탈락해 기존 정치 질서가 깨졌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마크롱과 르펜 중 누가 되든 프랑스엔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칠 거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둘 다 정치 기반이 약해 6월 총선에서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하면 프랑스가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리=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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